1932년부터 33년까지 만주엔 중국인·한국인등의 항일유격대 12개가 조직됐다. 한 자료에 의하면 34년 1월 동만 4개현(연길 왕청 혼춘 화룡)의 유격대원수는 7백여명이었고 총기는 5백여자루나 됐다고 한다. 유격대원중 가장 선봉에섰고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단연 조선족 청·장년들이었다. 항일연군 제2군을총지휘했던 주보중(한족)은 동북항일전쟁에서 조선족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1932년에 건립된 억센 동만유격대와 1933년에 건립된 반석유격대 주하유격대 밀산유격대 당원유격대 요하유격대는 모두 조선동지와 혁명적인 조선군중들에 의해 창건되었으며,후에 항일연군 제1,2,3,4,6,7군으로 발전하였다. 제5군에도 적지 않은우수한 조선동지들이 있었다. 항일연군 각군내의 군장,정치주임으로부터 소대장,지도원,각급 군정지도간부는 모두 조선동지들이었다".30~40년대 연길지역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한 여영준옹(79)을 만났다. 여옹은연길시 북산가(북산가) 어느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연변자치주 부주장(부주장)을 끝으로 은퇴,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인터뷰는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고향이 함경도 길주인데 먹고 살기가 하도 막막해 1928년 온식구가 연길현태양촌(태양촌)으로 이주했어요. 중국에 가면 굶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에 두만강을 건넜으나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소작료를 내고나면 먹을 양식조차 없었으니···" 힘겨웠던 지난날을 더듬는 여옹의 목소리는 어느새 물기를머금었다.
"14살이 되던 1930년쯤부터 야학을 다녔는데 이때부터 항일의식을 갖게 됐어요. 당시 야학선생들은 일본제국주의와 소련혁명이 성공한 얘기를 주로 했어요. 또 조선이 독립해야만 잘 산다고도 하고…처음에 혁명활동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했지요. 나이가 어려 항일단체의 통신문을 전달하거나 삐라를 살포했어요". 여옹에 따르면 당시 항일단체들이 비밀연락장소로 쓰던 집은 장대끝에 흰옷을 달아 구별을 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일본경찰이 나를 잡으러 집에 왔어요. 그러나 "의복도 형편없고 키(1백55㎝)도 작은 걸로 봐 혁명할 사람이 아니다"며 그냥 돌아갔어요. 32년부터 혁명조직활동을 본격적으로 했습니다. 집에서 등사기로 삐라를 만들었는데등사기를 일본경찰에 들킬까봐 상여와 같은 장례용품을 보관하는 상여막에 숨겨두었지요. 그러다가 32년 일제의 대토벌이 있었어요. 일본군은 기관총으로동네사람을 몰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어요. 눈에 띄는 조선사람은 다 죽였어요. 이때 아버지가 일본군에 잡혀 총살을 당했습니다. 조부가 겨우겨우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묻어 주었어요".
당시 여옹은 도망 중 일본군이 쏜 총탄에 어깨를 맞는등 죽을 고비를 수차례넘겼다. 1933년부터 여옹은 항일유격대의 통신병으로 활동했다. 34년 이후엔백구(일제가 지배하는 지역)에 들어가 공작활동도 했다. 첩보활동이 어려워지자 여옹은 왕우구유격근거지로 들어가 유격활동에 참가했다. 여옹의 얘기처럼33년 1월부터 만주의 항일유격대는 구국군 의용군 반일삼림대들과 항일무장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연합작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각지의유격대는 34년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확대편성, 새로운 투쟁의 전환기를 맞았다.
우선 동만에서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동만특위,특위군사부및유격대 책임자들이 34년 3월 연길현 삼도만 능지연에서 연석회의를 갖고 동만4개현의 유격대를 통합,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결성했다. 그 아래에는유격대대를 두었다. 여옹은 "연길 화룡 왕청 훈춘에 각각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소속 1,2,3,4단이 있었는데 나는 연길의 1단에 소속됐고 북한의 김일성 전주석은 3단에서 활동했다"고 전했다. "나자구등지에서 유격활동을 했는데 숲속에서만 기거하다보니 옥수수 나무껍질로 연명했지요. 고춧가루등으로만든 폭탄과 나무창을 갖고 일본군을 기습,무기를 빼앗아 전투를 하는 식으로싸웠습니다"
남만에서는 34년 11월7일 임강현 사도구이차(사도구이차)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창건됐다. 제1군 1사(사) 사장인 이홍광은 가장 혁혁한 전공을 거둔 항일투사였다. 이홍광은 일제가 '동성철벽'이라 부르며 자랑하던 평안북도동흥성을 35년 2월13일 부하 2백명을 데리고 기습공격,일본경찰 3명을 살상하고 일본인 16명을 사로잡았다. 총과 탄약등도 빼앗았다. 관동군 신문은 "동흥성사건은 9·18사변후 첫 대사건이며 국경경비에서의 전례없는 사건이다"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홍광은 같은해 4월 흥경현 호자구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하다 적의 총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동북인민혁명군의 활동으로 만주의 광활한 대지는 곳곳마다 항일유격전쟁의싸움터가 됐다. 헤아릴 수 없는 전투가 있었는데 이중 조선족이 직접 지휘하였거나 주요한 지휘자로 참가한 전투는 팔도구전투,왕청 나자구전투 ,호란진전투,유하 삼원포전투,호두습격전,대왕라즈매복전,경도선열차습격전,조선북부의동흥성습격전,류하현 타요령전투,신흥동전투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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