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장후보 인물조명-문희갑 공직 27년 소신지킨 경제통

입력 1995-06-05 00:00:00

민선대구시장에 나선 문희갑후보가 경제기획원 예산실장(82년)으로 재직하던시절이다. 당시는 경제의 안정화 기조를 바탕으로 흑자경제시대를 추구하던 주역으로 사상초유의 동결예산을 편성했다. 각부처 장·차관들이 예산을 삭감한다고 곳곳에서 항의소동이 벌어졌다. 그는 이미 편성된 예산에 대해 각부처 요구를 어떻게 다들어줄수 있느냐고 핏대를 올려가며 싸웠다고 한다. 이후 '문핏대'라는 별명이 따라 붙었다. 경찰들은 수사비와 정보비를 올려주지 않는다고미행하기도 했다. 그때 내무부장관이었던 노태우전대통령은 "도대체 문희갑이가 누구냐"며 열을 올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27년간의 관료생활이 몸에 밴 탓인지 아직도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있다는지적을 받고 있다. 갑자기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표정이 굳어져 주위 사람들을당황하게 만든다. 그는 고집이 세고 욕심이 많아 요구대로 다 못챙기는 참모들에게 화도 곧잘 내어 불화설도 종종 들리기도 한다. '소신에 따라 살고 불의와타협하지 않는다'는 문희갑의 좌우명이 이같은 결과를 낳고있다.성장과정·학창시절

경북고 재학시절. 방학만 되면 문희갑의 이른바 '화원부잣집'에는 친구들이끊이지 않았고 푸짐한 대접을 받으며 놀았다고 한다. 당시 그와 잘 어울려 다녔던 이화염직의 이충기사장은 "공부를 썩 잘했다고는 기억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우관계의 폭이 넓었다. 친구들 사이에 포용력이 넓었고 리더십과 의협심도강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37년 6월9일 달성군 화원읍 본리에서 대대로 부농이었던 명문가인 남평 문씨의 4남3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수봉선생은 구한말 유명한 한학자였다. 완고한 유교주의자였던 조부는 수많은 재산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신교육을 시키지않았다. 독립군 군자금 제공등으로 가세가 기울고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문후보의 부친인 형채씨는 체신공무원이 되었고 지방우체국장을 지내면서 자녀교육을 뒷바라지 했다.

대륜중학을 거쳐 경북고 2학년때부터 가세가 기울면서 학업이 떨어졌고 국민대학교 법과에 입학하게된다. 학력의 부족분은 이후 서울대 행정대학원,미국테네시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수료하면서 메워졌다.군입대·공직생활

곤궁한 집안 형편때문에 군에 일찍 입대했다. 공군장교로 근무하던 59년 12월 미국으로 군사유학을떠났다. 60년 5월까지 미국의 회계교육제도를 교육받기 위해서였다. 외국유학이 힘든 시절 당시 22세의 문희갑은 선진국 시찰에서"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대위로 예편한후 67년 제5회 행정고시에 합격,정부부처의 꽃이라 불리는 경제기획원에 발령받았다. 76년까지 9년6개월간 경제기획원의 기획국,예산국,경제협력국에서사무관으로 재직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통6~7년만에 서기관으로 승진하였지만고지식하게 공직생활을 해온 문후보는 승진이 늦었다. 그러나 76년 서기관승진이후부터는 비교적 승승장구한 편이었다. 기획원 기업예산과장,방위예산담당관으로 근무한후,78년 국방부 예산편성국장 직무대리로 승진하였다. 국방부 방위예산 개혁작업을 진두지휘 하면서 국방예산 삭감을 단행,모장군으로부터 "당신은 총살감"이라는 협박과 회유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79년 10·26당시에는 국방부에 근무하면서 한국현대사의 격동의 현장을 목격하는 역사 증인이되기도 했다. 80년 국보위 운영위원과 입법회의 전문위원으로 일하며 전두환전대통령등 군부실세들과 교분을 가졌다. 아마도 군부 실세가 바뀌면서 문희갑의 이같은 '핏대'가 5~6공 경제의 실세로 등장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지 않았느냐는 얘기가 많다.

이후의 공직자로서 승승장구하게된 배경이 5·6공 군부세력과 밀착되었기 때문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80년대초 예산동결로 물가안정과 성장의 토대를 쌓던 대통령의 지도력이 인상적이기는 했다. 기획원 사무관 시절 핵심업무를 맡아 바탕을 탄탄하게 닦았다. 그러나 누구에게 인사청탁을 해본 적이 없으며 군부실세들과 밀착한 적은 결코 없다"고 강조했다.

1982년에는 국가살림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으로 부임해 특유의 소신과 실천력으로 종래 성역(성역)으로 인식되어 오던 국방예산과 각부처의 기밀비 등을 예외없이 삭감하는 등 예산편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85년 경제전문가로서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12대 국회에 진출했으나 7개월만에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행정부로 복귀해 3년6개월간 경제의 실무책임을 맡게 되었고 남북경제회담 수석대표로도 활약했다. 88년에는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으로 경제정책 전반을 통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우리가 선진경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 도입, 재벌의 집중완화,중소기업육성 등 경제개혁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90년 4월 대구를들끓게 하고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4·3보궐선거에 출마하게 된것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 시초였으며 3당합당의 정당성을 비축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고한다. 92년 3·24총선에서 패배한 후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환경문제와 첨단산업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한후 지난해 9월 귀국했다.

경제계와 학계에서는 문후보가 주도한 5·6공의 경제에 대해 3공에서 키워온과실을 따먹은데 불과하고 기본철학이 부족했고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게을리해 엄청난 물류비용의 증가를 가져왔으며 주택 2백만호 건설의 부작용등비판의 시각도 만만치 않은게 사실이다.

△결혼·가족관계

부인 정송자씨와는 7년간의 교제끝에 63년 11월3일 학생의 날에 결혼해 슬하에 지영,지경,지원양등 3녀를 두고있다. 딸셋 모두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큰딸은 결혼해서 남편과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둘째는 신부수업중이며 막내는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가야금을 전공하고 있다. 두사람은 문후보의사촌누이의 소개로 만나게 된 후 자주 만날 기회가 없어 주로 편지로 사랑을주고 받았다. 7년간 문후보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는 2백여통에 달하고 있는데아직도 부인은 당시의 편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부인 정씨는 "마치 일을 위해 태어난 분 같습니다. 30년이 넘도록 일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듬직하고 인상이 강해 결혼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취미·성격

취미는 등산과 독서. 스포츠는만능에 가까우며 해발 1천m 이상되는 국내의산은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인데 서기관시절 일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다니며체력을 다졌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전공인 경제학 관련서적과 논문은 물론, 역사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존·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을 감명깊게 읽었다. 사회의 모든 부분이균형발전을 이루고 모두가 함께 사는 경제를 추구해 온 그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정의관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구시장으로 나와 오랜 경제관료의 경험으로낙후된 고향 대구의 경제를 회생시켜 보겠다는것이 정치인에서행정가로 선회하게 된 배경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행동보다는 말이 앞서고 정책비전 보다는 정략이 앞서는 정치풍토나 토양이 맞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별명같이 고집이 세고 곧잘 큰소리를 낸다. 소신있게 밀어붙이는데서 나온 얘기이기도 하지만 그의 이같은 성격이 흐트러져 있는 대구의 민심을 화합의 장으로 모으는 데는 부적합하지 않나 하는 우려의 지적도 나오고있다. 중앙정치권이나 중앙정부,대구시의회와의 로비를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도 우려하는 시각이 높다.

〈정동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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