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50년 해외 기획취재 시리즈-5·30폭동

입력 1995-05-17 08:00:00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박영석교수는 저서 '만주·노령지역의 독립운동'에서 "만주지역의 공산주의운동에 대해 다루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했다. "앞으로 이점에 대해 보완하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일제하 항일운동체는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로 크게 나눌 수 있다.양계열은 새의 날개처럼 협력 또는 경쟁을 하면서 조국해방을 쟁취해 냈다. 그러나 박교수의 지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뒷날 서로가 서로를 부정함으로써항일운동의 역사도 왜곡되고 변질됐다. 북한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완전 부인했고 남한 역시 공산주의계열의 항일투쟁을 의도적으로 지우고 말살했다.이 시리즈는 한참 동안 30년대 만주 사변 이후 중일전쟁 이전까지 중국 본토에서 시도됐던 항일투쟁을 얘기해 왔지만, 그것은 거의 민족주의 계열 지사들의 활동에 관한 것이었다. 반면 당시 공산 계열 활동은 상대적으로 만주 지역에서 활발했다. 중국측 국민당 계열이 만주에서 손을 떼다시피 하고 있던 데반해 공산당은 만주 공작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 이러한 우리측 계열간 차이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을 것이다.

이제 다시 몇회에 걸쳐 만주지역 항일운동을 살필 참이지만,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30년대 그쪽 이야기는 사실상 공산계열 활동 중심이 되기도 할 터이다.

1917년 10월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은 전세계 약소민족들을 각성시켰다. 특히식민지하에서 허덕이던 한민족에게 혁명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소련과 인접한 만주지역에는 1920년대초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빠르게 전파됐다. 일제의 경신 대토벌로 소련 시베리아로 몸을 피했다 돌아온 청년들이 소련의 10월혁명 경험을 소개했던 것이다.

이에따라 만주지역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전하는 서적과 간행물등이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용정(용정)의 여러 학원과 중학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론 보급운동이 활발히 펼쳐져 다수의 항일청년들을 배출했다. 1925년에서 26년사이에 남만주와 북만주 연변에서는 앞다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적기단' '한족노동당'과 같은 청년및 농민단체들이 결성됐다. 이들단체의 사상적 신조는 비록 공산주의였으나 밑바닥엔 항일민족주의 정신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1925년 4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26년 5월 만주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결성했다. 본부는 영안현 영고탑에 두었다. 비서부 책임비서는 죽산(죽산) 조봉암선생이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동·남·북만주에 각각 구역국을 설치하고 앞서의 여러단체들을 지도하며 반일투쟁을 해나갔다.

1927년초부터 길림,용정 등지에서는 한민족 노동자 및 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랐다. 대경실색한 일제는 1·2차간도 공산당사건을 조작, 1백여명이 넘는 사람을 체포, 구금하였다. 1930년 1월엔 용정의 각 학교 학생들이 광주학생의거에 자극받아 대대적인 반일시위를 벌였다.

1930년 5월1일 만주의 한민족과 중국인들은 국제노동절을 기념하고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에 돌입했다. 용정에서는 파업과 동맹휴학도 이어졌다. 화룡현 약수동의조선족 농민들은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고 고리대 계약서와 장부를 불살랐다. 하얼빈의 일본영사관도 습격했다.5월30일 연변에서는 드디어 무장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을 주도한 중국공산당연변특별지부는 "전 연변의 각 민족 인민들은 연합하여 5·30폭동을 일으키자"는등의 투쟁구호를 내걸었다. 30일 오후 화룡현 약수동 장인강 세린하 이도구와 명풍동 일대의 수백명 군중들은 이도구와 삼도구및 용정 방면으로 뻗어나간전화선을 끊었다. 이들은 또 두도구에 있던 친일기관 사무실과 조선총독부에서운영한 사도구 중평촌의보광학교를 불태웠다. 두도구 일본영사분관도 들이쳤다.

같은날 용정의 혁명군중들은 동산 대륙고무공장 부근에 집결했다가 다시 2개대로 갈라져 행동하였다. 이중 한개대는 대불동으로 가서 조선으로 통하는 전화선을 끊고 발전소를 습격했다.다른 한개대는 용정역전의 간도 철도기관 창고를 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개대는 다시 집결한 후 일본동양척식회사간도출장소를 폭탄으로 부수었다. 또 해란강 경편철교의 양끝에 불을 질렀다.연길등 다른 곳에서도 폭동이 일어나 총독부가 운영하는 학교와 친일기관들이불탔다. 폭동은 6월에도 계속됐고 다른 지역으로 확산됐다.5·30폭동의 중심지였던 용시. 인구는 26만여명. 이 중 70%인 약 18만여명이조선족이다. 한민족의 애환을 머금은 해란강은 용정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폭동당시 군중들이 폭파, 파손시켰다는 용정철교를찾았다. 마침 증기기관차가굉음을 토해내며 용정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폭동을 기념한 흔적은 없었다. 폭우로 물이 불어난 해란강가엔 사람들이 투망질을 하며 고기를 잡고 있었다.해란강은 아름다운 전설을 갖고 있다. "옛날 옛적에 해란강을 사이에 두고양마을이 있었다. 어느날 강속에서 악마가 나타나 미녀와 양식을 빼앗아 가곤했다. 그래서 '해'라는 청년이 검술실력을 발휘, 악마의 목을 베었으나 떨어졌던 목이 다시 붙어 악마가 살아났다. 그런데 반대편 마을에 살던 '란'이란 처녀가 이모습을 보고 재를 가져와 잘려진 악마의 목에다 뿌려 악마를 퇴치했다.해와 란은 부부가 돼 정답게 살았고 강의 이름은 해란강이 됐다"는 것이다.갈라선지 50년이 된 남한과 북한, 해와 란처럼 정답게 살날은 언제올지….해란강은 취재진을 깊은 상념에 젖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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