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상처는 일제36년의 수난기를지나 갓 걸음마를 떼어놓으려는 체육계에도 미칠수밖에 없었다.해방 이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며 체계와 조직을 만들어나가던 각종 스포츠는 일시에 암흑속에 빠져들었다.
1949년 영남체육회에서 경북체육회로 거듭나며 체계를 잡아가던 체육인들은 도청에 겨우 곁방살이하는 처지에 놓였다.
지역민들과 체육인들이 각고의 정성을 들인 칠성동 종합경기장마저 미군이점령, 주둔했다.
모든 종목이 경기장, 장비 등의 사정으로 완전중단상태에 빠졌지만 육상만은 근근이 명맥을 이어갔다.
6·25 발발직전의 육상계 일화.
6월21일 서울서 열린 전국학도체육대회에 참가한 경북선수단은 경기가 끝나는대로 대구로 돌아왔지만 일부 육상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23일이후에도 서울에 머물렀다.
대구중과 강릉농고간 축구결승전이 25일 치러지기 때문.
느닷없이 경기가 오후 3시에서 12시로 당겨졌지만 축구광인 육상선수들은영문도 모른채 열띤 응원을 펼쳤다.
당시 선수단을 이끈 이경철씨는 "축구경기가 끝나고도 전쟁사실을 몰라 그날밤을 여유있게 서울서 보냈습니다. 이튿날 아침일찍 기차를 타지 않았으면몇달을 서울서 보낼뻔 했지요"라고 회고했다.
해방후 사대부고 운동장에서 자율훈련하던 선수들은 전쟁이 터지자 동촌방둑으로 자리를 옮겨 연습을 계속했다.
여기에 보스턴마라톤 우승자 서윤복을 위시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 유명선수들이 대구로 피난와 훈련에 합류하면서 육상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피난동안 서윤복은 영남중 마라톤코치로도 활동했고 단거리에서 명성을 날리던 윤경호가 그의 뒤를 이어 50년대중반부터 영남중고가 전국무대를 석권하는 계기가 됐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도 제32회 전국체육대회가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등 6개도가 참가한 가운데 광주에서 열렸다.
구기종목이 전멸상태에 놓여있던 경북팀은 육상에서 거의 전부문을 휩쓰는활약으로 종합3위를 차지했다.
이때 선수로는 마라톤에 서병태 박덕문, 단거리에 엄팔용 이이재 이영달 이정혁 등의 남자선수와 김소식(경북여고)서미진(신명여고) 박복조(대구여고)등.
1952년 부산에 내려와 있던 대한체육회는 헬싱키올림픽을 앞두고 대구에 육상인들이 대거 모인 점을 고려, 대구에서 육상예선전을 가졌다.어지간한 도로는 군작전도로로사용돼 마라톤코스는 달성공원~화원간을 왕복하는 레이스가 펼쳐져 1위 홍종호(전남) 2위 최윤칠 3위 김윤범 등이 선발됐다.
전쟁통에 벌어진 마라톤이어서시민들의 관심은 오히려 더해 골인지점인 달성공원에는 구경인파가 몰려 경찰이 통제불능의 지경에 이를 정도.이때문에 가까스로 결승점에 이른 선수들이 사람들의 머리위로 높이 치켜든 결승테이프를 손으로 움켜쥐고 골인하는 진기한 장면도 벌어졌다.헬싱키올림픽 육상에는 단거리에 대륜학교의 엄팔용도 선발돼 마라톤선수들과 함께 왜관 하양 등지를 돌며 훈련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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