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도시의 푸른나무(92)

입력 1995-04-21 00:00:00

낮이 길어진다. 두차례 비가 온다. 가뭄 해갈에는 턱없이 모자란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비온뒤는 겨울처럼 춥다. 그러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진다. 봄 없이 여름이 올는지 모른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어느날 저녁 무렵이다. 나는옥상에서 지는 노을을 본다. 붉은 색이 도시 너머로 스러진다. 쌍침형은 비디오를 보고 있다. 열린 문으로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깨어지고부서지는 소리도 들린다. 조폭끼리 격투가 있는 모양이다.옥상의 쇠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한번 두드리고 멈췄다 두번 두드린다.식구가 보내는 신호다. 나는 뛰어간다. 빗장을 연다. 기요와 짱구다. 그뒤로두 사람이 계단을 밟고 올라온다. 불곰형이 허리 숙여 들어온다. 옥상 문은낮다. 불곰형이 빠져 나올때, 문이 비좁다. 불곰형은 씨름선수 체격이다. 스포츠칼라로 머리를 짧게 깎았다. 체크무늬 윗도리에 검정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는 최상무파의 으뜸 조장이다.

셋이 쇠문 앞에서 차려자세를 취한다. 기요와 짱구가 나란히, 불곰형이 마주보고 선다. 나도 얼른 짱구 옆에 선다. 가슴을 내민다. 목에 힘을 준다. 그사이로 최상무가 들어선다. 최상무는 짙은 청색 윗도리를 입고 있다. 윗주머니에 진홍 손수건을 꽂았다. 뉴스에서 더러 보았다. 대통령의 의장대 사열이그랬다. 최상무는 깡마르다. 마른 얼굴이 깜조록하다. 날카로운 눈길로 나를힐끗 본다.

-최상무님은 사실 회장님이시지. 업소를 여러개 가지고 있으니깐. 그러나 우리 식구들은 그냥 상무님이라 불러. 상무님도 그 호칭을 좋아하구. 나이트클럽 상무 시절에 우리 구역을 잡았대. 일식이파를 해치운 거야. 나와바리(관할구역)가 그때 만들어졌어. 일식이파를 정리할때 불곰형이 행동대장으로 나섰대. 닙본도(일본검)를 들고. 상무님은 저렇게 왕명태인데 태권도가 사단,합기도가 오단이야. 업소의 문지기를 할때 기요가 말했다. 가건물의 텔레비전 소리가 사라진다.

"상무님, 예의가 말이 아닙니다"

쌍침형이 휠체어를 바깥으로 돌린다. 머리를 숙여 절을 한다. 불곰형이 최상무 뒤에 손 맞잡고 선다. 그뒤에 기요, 짱구, 내가 선다. 나도 기요와 짱구처럼 손을 맞잡는다.

"경과가 어때?"

최상무가 쌍침형에게 묻는다. 쉰듯한 탁한 목소리다.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꽂고 있다.

"이제 많이 좋아졌습니다. 주말쯤 깁스를 뗄까 합니다. 걷는 연습도 해야지요"

"넌 언제나 미행꾼을 달고 다니잖아. 당해도 싸"

"회복만 되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쌍침형의 은결든 목소리다. 머리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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