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27왕 가운데 연산군과 더불어 조나 종의 칭호없이 다만 군으로만불려지는 광해군(1575~1641)은 국방 외교면에서 탁월한 수완을 보였으나 당쟁에 휘말려 동복형 임해군과 영창대군(선조의 적자)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서궁에 유폐시킨 패륜 때문에 재위 15년만에 인조반정(1623년)으로 물러났다.동시대인 17세기 초엽, 유럽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자유의 상 '다비드'를 조각하고 르네상스가 찬란하게 꽃피어 탐스러운 열매를 맺은지도 오래지만 이 땅에는 '봉건과 사대' '이기설과 예론'이라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인조반정 한해전에 태어난 반계 유형원(1622~1673)은 17세기 조선이 낳은 대표적 사상가이며 실학의 비조이다.
문화 유씨로 서울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나서 52세(현종 14년)로 일생을 마칠때까지 평생을 관계에 진출하지 않고 학자생활로 일관하며 조선사회를 풍미하던 교조주의적 학풍을 증오하고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한 경세가적 학술을강조했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영 서울을 떠나 전라도 부안군우반리로 옮겨가서 1673년에 죽을때까지 농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가 농민속에서 생활하였던 17세기 중엽의 조선사회는 임란의 상처가 채 아물지않아농촌사회가 극도로 피폐한 시기였다. 일각에서는 전쟁의 상처를 씻고 농촌을부흥시키려는 의욕적인 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으며 나아가서 각종 제도전반에 걸친 개혁이 절실히 요청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비록 권력권에서 멀리 떨어져있기는 하였지만 이와같은 시대적 요청을 절감하였고 그것에 대응하는 지식인의 사명을 깨달았던 그는 중앙정계가 당쟁의와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농민들의 곁에 살면서 농촌부흥의 방향과 제도개편의 방법론을 연구하고 또 일부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던것이다.
20여년간 계속된 그의 연구작업은 대단히 광범위한 것이어서 정치 경제 군사교육 사회문제는 물론 역사 지리 언어등의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을 하였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단지 '반계수록'(반계수록)만이 전해져서 그의 폭넓은 학문세계를 대변하고 있다.
'반계수록'은 모두 26권 13책으로 내용은 전제(토지제도) 교선제(교육) 임관제(관리의 채용요령) 직관제(관리제도 비판) 녹제(봉급제도 비판) 병제(국방)의 6개 분야로 나뉘어져있고, 여기에 속편이 있어서 노예제도 언어등을보충한 제세구민의 개혁론을 담고 있다. 여기서 반계는 토지제도의 정비위에국민의 부담과 국가의 재정을 논하고 그 위에 국방과 학제를 바로 세울 것을주장했다.
서술방법은 국정 각 분야에 걸친 현행제도의 모순성을 지적하고 자기의 개혁론을 체계적으로 개진하고 있으며 각 분야마다 고설을 붙여서 그 제도에 대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고증 서술하고 있다.자신이 구상하는 제도의 개혁안을 설명하면서 중국 옛 사상가들의 이름을 원용하기도 했지만 이이(이이)나 조헌(조헌)같은 사람들의 저술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서 초기 실학의 체계를 수립한 그의 사상적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그러나 이이나 조헌이 실학자로 불리지 않는데 반해 유형원이 실학자로 불리는 이유는 전술한 두사람의 사상과 유형원의 사상과의 차이점을 각종 제도의개혁론 하나하나마다 찾아낼 수 있다.
"치국안민할 수 있는 대정치가"(미수 허목)
"유형원은 일개 군대의 식량을 능히 조달할 수 있는 인재인데 속절없이 바닷가에서 늙는다"(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중)
"조선 입국 이래 수백년간 시무를 아는 학자는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 두사람뿐인데 반계는 근본적으로 혁신하여 이상적 정치를 논파하였으니 개혁의 뜻이 참으로 크다"(성호 이익)
태어날 때부터 등에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점이 있었고, 준수한 얼굴에 눈빛은 사람을 쏘는 듯하여 언뜻 보아도 비상한 수양과 사상의 소유자임을 풍기던 유형원은 할아버지의 강요로 33세때에 진사시험에 합격했을 뿐 과거와 벼슬을 거부하고 오직 저술에만 전념했다.
민유중(뒷날 숙종의 장인)이 그의 재능을 국왕에게 천거하려는 것도 다른 대관들이 벼슬을 주려는 것도 모두 거절했다. 좋은 출세의 기회에 어찌하여 유형원은 그처럼 냉담하였을까.
당시 통치계급들은 정권쟁탈을 위한 파쟁을 계속하면서 백성의 적개심을 자기들의 지위유지에 이용하기 위하여 소위 '존명' '북벌'의 위선적인 간판을내걸었다. 이런 정국에 환멸을 느낀 반계는 단순히 자기 개인의 영달 추구에몰두하던 당시의 양반정치에 뛰어들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전투구와 같은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는 대신 우반동 앞바다에 직접 고안한편리하고 큰 배 4~5척을 만들어 띄워놓고 그 성능을 시험하고 매일 수백리를달릴 수 있는 준마를 길렀으며, 좋은 활과 조총 수십자루를 구하여 촌민과노복들에게 사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국방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벼슬을탐하기보다 허물어진 나라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수 있는 방안을 찾으며 임란 호란에 대한 복수를 대비했다고나 할까.
사대부의 자손이지만 평민들과 더불어 살기를 좋아했고, 끝까지 양반사회를지지하지 아니한 까닭에 그의 재능과 정치적 포부는 당대에 날개를 달지 못했으나 그의 사후 18세기에 들어와서 성호일파의 실학이 발전하면서 반계의사상과 이론이 계승 발전되고 그의 명성과 영향은 커졌다.
당파의 장벽을 뚫고 후대 학자들간에 널리 읽혀졌던 반계수록은 임란 호란등으로 인해 파탄에 빠진 조선사회체제의 재정비안을 담은 노작이었으며 17세기 이후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데 적합한 개혁론이었다.
그러나 이 방대한 저서는 오랫동안 초고로서 등사전파되고 있다가 영조 17년승지 양득중에 의하여 왕의 주목을 끌게 돼 왕은 홍계희에게 이를 간행하도록 명했으며 영조 45년(1769년) 경상감영에서 인쇄됐다. 그의 사후 거의 1백년만의 일이었다.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 계명대 한적실등에 보관돼있다.〈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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