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수덕자 홍유한 재조명 활발

입력 1995-03-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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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 사상 첫 '수덕자'로 우리나라 가톨릭 창립의 밀알이 된 홍유한(1726~1785)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천주교 안동교구(교구장 박석희 주교)는 교구 설정 25주년과 홍유한 선종210주년을 기념하여 각종 고문서에서 그의 행장을 발췌 번역한데 이어 홍유한의 문집인 '농은집' 출간과 묘역 축성식(5월27일)을 갖는다.이와함께 안동교구 봉화성당(주임신부 한상덕 안토니오) 성지개발위원회(위원장 김용기)는 홍유한의 묘소가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 산 56번지에 있는 것을 발견, 묘역을 단장하고 있다.

정조 임금의 외가집안에서 태어난 홍유한은 16세때 실학자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채제공 안정복 권철신 정상기등과 함께 수학했으며 '천주실의'와 '칠극'을 공부했다. 1757년, 충청도 예산으로 내려가서 수계생활을 하려고 했으나뜻한 바대로 잘 되지않아 1775년에 경북 영주 순흥마을로 내려가 6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철저하게 수계생활과 기도에만 전념하였다."1785년에 선종한 홍유한이 이승훈의 영세(1784년) 사실이나 성세성사를알리 없었지만 유학자로서 '천주실의' '칠극'을 받아들였고, 축일표나 기도책도 없이 매 7일마다 주일을 지키고 수계생활을 한 점이 의미깊다"는 박석희주교는 "그가 학문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자연계시) 국내 첫 수덕자"라고 밝혔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서학을 접하고 수계생활을 한 자세는 한국 천주교회의 자생력에 다름아니다"고 들려주는 한상덕신부(파리외방전교회)는 최근에 발견된 문수산 홍유한 성지개발을 거의 마무리해 둔 상태이다."금육일은 몰랐지만 언제나 좋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대신했고, 많은자선사업을 폈으며 30세 이후에는 내방 거처를 전폐하여 자녀를 낳지 않고30년 이상 정덕을 지켰다"는 마백락씨(영남교회사연구소장)는 홍유한의 영향으로 후손중에 권철신 홍낙민등 13명의 순교자가 나왔으며 그중 6명이 1백3위 순교성인에 들었다고 강조했다.

한편 지역 천주교계에서는 권철신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1784년, 농은집중)에는 "우리들 무리중 몇 사람이 당초에 약속했던 일 가운데 서로 손을 마주잡고 함께 하자던 계획이 마침내 공으로 하여금 그르치게 되고 말았습니다…"라는 문구가 보여 천진암 강학회(1779년)보다 5년이나 빠른 강학회를홍유한 권철신등이 추진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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