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백호 윤휴-닫힌 정통론 거부 학문 주체성 주창

입력 1995-03-23 08:00:00

1659년, 효종의 국상이 닥쳤다.비운의 소현세자(인조의 맏아들)가 급서하는 바람에 차남(봉림대군)으로 왕통을 이은 효종이 재위 10년만에 승하하자 조정은 효종의 계모 조대비가 몇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요즘에야 장례를 치르고 돌아서서 탈상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조선시대의 예(예)는 오늘날의 공법(공법)과 같은 성질을 지녔다.

당시 서인을 대표하는 우암 송시열(우암 송시열)은 '맏아들이 죽으면 그 부모는 3년복을 입고 차남의 경우에는 1년복을 입는다'는 사대부의 예설(예설)에 따라 기년복(기년복)을 주장했으나 백호 윤휴(1617~1680)는 '왕통을 이은경우에는 장·차자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면서 '3년복'을 주장, 정면으로 충돌했다.

바로 '기해예송'이다. 이때는 기년복설이 받아들여져 송시열등 서인이 정계에 대거진출한 반면 남인은 축출됐다. 당시만 해도 윤휴(43세)는 어느 당파에도 얽매이지 않고 폭넓게 교류하며 학문을 논했으나 남인이 그의 지론에동조하게 됨으로써 자의반 타의반 당파싸움에 말려들게 되었다.그러나 15년 뒤인 1674년, 효종비의 상을 둘러싸고 제2차 예송(갑인예송)이재연됐는데 이번에는 대공복(대공복, 9개월복)을 주장한 서인 대신 기년복(일년복)을 주장한 윤휴의 예설이 채택되어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정권을잡았다.

윤휴는 정권을 잡은 남인과 숙종의 거듭된 출사요구로 이순을 앞두고 뒤늦게관직에 나갔다가 수년만에 조정의 제2인자에 올랐으나 유학의 정통을 어지럽힌다는 사문난적(사문난적)과 역모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받았다.그는 양난이후 양반통치계급의 무능력과 제도적 불합리성이 폭로되기 시작하던 17세기초 선비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 윤관은 정암 조광조를 사사한 선비였고, 부친 윤효전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에게 수학하고 대사헌에 올랐으나 광해군의 '인목대비 유폐'에 반대하여 외직(경주부윤)을 자청했다. 부친의 임지인 경주에서 태어난 윤휴는 세살때 아버지를 잃고 이괄의난(8세), 정묘재란(11세), 병자호란(20세)을 연거푸 겪으면서도 학문에 전념했다.

대개의 천재들처럼 그는 이미 20대에 학문적 명망을 떨쳤다. 백호는 21세때호란을 피해 속리산 복천사(지금의 법주사 복천암)에 머물면서 당대의 석학이던 우암과 상면, 3일간 격의없이 토론한 적이 있었다. 우암은 그때를 돌이켜 "나의 30년 독서가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였으며 22세때 유천(공주)으로 이사가자 뒷날 기호학파의 거장들인 윤선거 권시 송시열 이유태등 명사들이 그와 사귀고자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이때 그는 '사단칠정 인심도심설'(사단칠정 인심도심설)을 저술하여 퇴계와 율곡의 어느편에도 서지않고 독자적인 성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적 중심은 성리학보다 경학이라고 할 수 있다.서울대 금장태교수(종교학)는 '유맥'(유맥)에서 "중용설, 홍범설, 주례설등을 저술하여 성리학의 전통에 구애받지않고 창의적인 경전해석을 모색했다"면서 윤휴는 퇴계와 율곡은 물론 주자까지도 학문적 성장과정속의 인물로 규정함으로써 주자를 학문적 완성자로 보는 송시열(정통론)과 첨예하게 대립했다고 밝혔다.

자신의 문집을 '주자대전'을 본따 '송자대전'으로 일컬을만큼 주자를 공경한송시열은 윤휴가 주자의 주설을 틀렸다고 보고 자기의 견해로서 이를 대신한점, 중용의 장구를 없애고 신주(신주, 새로운 주석)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르친 점, 그의 저서에서 주자는 부친의 지위를 찬탈한 송나라 영종을 모셨기에 불의의 왕밑에 신하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암시하여 주자에게 인신공격을가했다는 점, 종래에는 공자라도 잘못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들어 사문난적으로 몰고갔다.

흔히 '17세기의 정통론과 이단론'으로 불리는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에 대해금교수는 "죽음을 무릅쓰고 학문의 자유를 주창한 열린 사고와 닫힌 사고의뚜렷한 대조인 동시에 도학에서 실학에로의 선명한 방향전환"이라고 강조했다.

17세기 유교사상은 도학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보수파들이 주류를 이뤘고,소수의 지식인들만 예리한 현실인식에 기초하여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진보적태도를 지녀 실학의 태동을 예고하고 있었다. 윤휴는 바로 도학의 테두리에속하면서도 새로운 변혁논리를 잉태, 다음시대에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사상적 변천의 창조적 계기를 간직하여 윤휴-이익-권철신-정약용으로 이어지는실학을 태동시켰다.

윤휴의 경학적 성숙은 40~50대의 '대학고본별록'(대학고본별록) '중용장구보록'(중용장구보록)등 본격적인 경전주석에서 이루어진다.

"성현을 배우려면 먼저 성인의 교훈과 심법의 요지를 올바로 해득해야한다던윤휴는 고전의 참뜻을 연구하고 고증적 학풍을 일으킴으로써 우상화된 주자와 터부시된 주자의 경전주해에 도전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지성적 용기를 보여준 대학자"라고 '한국인물대계'는 평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며 나는 알 수 없을까. 주자는 그만두고 오직진리만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경전의 근본정신을 역설하고 학문의 자유를 주창한 그의 학설은 바로 천여년간 계속된 중세 암흑기 신의 억압에서벗어나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기치를 높였던 서구의 르네상스와 맥이 통한다"고 경북대 송휘칠교수(정치 철학)는 밝혔다.

윤휴는 20세때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외교 국방 내치를 논하는 '만언소'(만언소)를 초하였지만 어머니의 권유로 상소를 포기했고, 이듬해에 청나라가 내침하여 국왕이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되자 통곡하며 이 치욕을 씻을수 있을 때까지 결코 조정에 나가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제2차예송 후 출사할 때까지 향후 39년동안 관직을 사양한 것은 이런 청심때문이었다.2차예송이후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조정의 관심과 함께 국왕의 출사 권유가 거듭되자 그는 간단한 상소문인 차자(차자)를 들고 경연에 올라 국가의백년대계를 위해 국론을 통일하고 인재를 올바로 등용하기 위해 언로를 틔우며 지방행정을 쇄신하고 군비를 확장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숙종은 시무책을높이 평가하여 '성균관사업'(종4품) 벼슬을 내린다.

59세에 첫 벼슬길에 나가면서 그는 임금과 백성의 관계를 배와 물에 비유한'가어주수설해'(가어주수설해)를 올렸다. 이는 배(임금)가 비록 물(백성) 위에 떠있지만 물이 성나면 자칫 배가 뒤집힌다는 내용으로 임금의 실정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민본원리를 제시하였다. 현실정치의 위기의식에서 그는 제도의 폐단과 그 개혁책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백성의 부담이 되고 국력의 기초인 조세제도에서 지배층의 특권이 된 면세전(궁둔전, 관둔전포함)을 폐지하며 호에 따른 호포법을 실시하도록 요구했다. 또 나아가 군역과 과거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국민개병제(오가통법과 지패법)와 공거제(각계에서 인재를 추천하는 제도)를 제안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다만 무과급제자를 뽑아 체부(체부)를 설치, 병권을 일원화하자는 건의는 받아들여졌으나 반대의 소리가 드높아져 일년만에 폐지됐다. 문무양권을 분립시키자는 진보적인 주장이 벽에 부딪히자 사직하고 야인으로 돌아온 그는 직간접으로 '체부 재설'과 북벌론을 펴나가고 있었다. 마침 '오삼계의 난'으로위기에 놓였던 청나라로 쳐들어가자는 북벌론은 '북벌을 빙자하여 체부를 설치, 병권을 차지하려한다'는 비난을 듣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한 원인이되었다.

당쟁의 주역아닌 주역으로, 학문의 주체성을 자각한 선각자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삼정의 개혁을 시도했던 열린 사고의 주인공 윤휴의 억울한 죽음은 10년뒤 영의정으로 추증받았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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