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난 10년준비 계획된 거사

입력 1995-03-20 08:00:00

19세기 초 평안도 지역에서 발생, 실패로 끝난 홍경래난은 한 개인의 난이아니라 이 지역향촌의 중간층 이른바 '경영형 부농층'이 10여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주도했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영남대 정석종교수(조선사)는 최근 출간한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한길사 펴냄)에서 홍경래난을 주도한 인물은 거의 1백여명으로 소수가 아니었고참가 인물도 그 지역 농촌사회의 지식층으로서 부와 신분을 확보하여가는 경영형 부농층으로 군자금 조달을 위해 사상(사상) 특히 송상(송상, 개성상인)과의 제휴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봉기군을 총지휘한 핵심인물들은 사회변혁을 예언하던 홍경래 우군칙 김사용과 같은 유랑 지식인층으로 이들은 모두 지사(풍수)였다. 이들이난의 초기에 일선 봉기군으로 채택한 층은 광산노동자로 평안도 지방민의 푸대접을 격문에서 강조하고 있으며 관서지방의 민간전승인 정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정감록과 결부시켜 일반민중의 현실적인 요구보다 공상적인 측면에호소하고 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강령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봉기군의 최대 약점으로 결국 난이 실패로 돌아간 근본원인"이라는 정교수는 이와같은 봉기군 지휘부의 계층구성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해 난 발발(1811년 12월 18일)후 10일만에 가산 곽산 정주 박천등 9개 거점을 확보했으나 정주를 제외한 거점은 다시 한달도 안돼 관군에게 뺏기고 만다고 밝혔다.'박천 송림전투'와 '곽산 사송야전투'에서의 참패로 가산 곽산등지의 농민군 다수가 정주성으로 봉기군을 따라가게 되고 봉기군은 광산노동자에서 농민군으로 재구성되었다. 정주성을 점령한 봉기군이 관군보다 모든 면에서열세에도 불구하고 4개월간이나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일체의 농민약탈을지양하고 새로운 합리적인 정체(정체)를 구상했던 혁명성과 정주성 주위의백성이 봉기군을 위하여 정보와 군량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경래난은 식량의 부족, 지휘부에서의 상인층의 배신, 하층 농민층의 지지결여로인한 호응세력의 결여등으로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난을 분수령으로 하여 농민층은 그들의 힘을 구체적으로 인식,관세납부 거부, 무력항쟁등을 일삼아 봉건사회 붕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고 마무리지었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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