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체육의 맥-육상1-트랙도 없고 맨발로 달렸지만 열기만큼은 최고

입력 1995-03-14 08:00:00

육상은 모든 스포츠의 기초종목으로 꼽힌다.육상이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도입된 것은 서구문물이 물밀듯이 밀어닥치던1900년대 초반.

신교육령에 의해 설치되기 시작한 근대교육기관, 특히 외국인이 경영했던 사립학교가 바로 근대스포츠의 산실이 됐다.

외국인선교사들의 지도로 축구 야구 등과 함께 육상도 정식스포츠로 보급되기시작했다.

이때부터 육상도 스포츠의 개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기초운동으로 달리기에 열중했다.

그러나 사대사상에 젖은 양반들이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체육은 그다지 활기를 띠지 못했고 이같은 상황은 일제초반까지 이어졌다.

이로 인해 근대스포츠는 1920년대 이르러서야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거행될수 있었다.

대구 경북지방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1906년 미국선교사 앤더슨에 의해 계성학교가 설립되고 뒤이어 1907년 신명여학교가 설립되는 등 신교육의 싹이 트면서 축구와 야구 육상 등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

학교체육을 통해 시작된 육상은 일종의 시민잔치인 시민운동회를 계기로 그저변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최초의 지역육상대회는 1911년 달성공원에서 열린 대구시민대운동회.운동회는 당시 민족단체인 간이회(간이회)가 주관했고 대구공립보통학교 해성(효성국전신)대남(희도국전신) 계성 농림학교 등이 참가했다.운동회라야 육상경기가 전부였고 그나마 트랙 등 시설뿐만 아니라 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엉성하기 짝이 없는 대회였다.

그러나 경기내용에 비해 시민들이 보인 열기는 대단했다.

대회시작시간인 오전10시가 채 못돼 달성공원이 3천이 넘는 관중들로 발디딜틈없이 메워졌을 정도.

당시 대구인구가 4만정도였으니 운동회에 대한 관심은 쉽게 짐작할수 있다.관중석도 없이 트랙안팎을 차지한 관중들은 선수들과 함께 달리고 응원을 하며 나라잃은 설움을 달랬다.

육상경기라고 하지만 종목이 다양하지 않아 기껏 50m 100m와 트랙을 한바퀴씩도는 계주 그리고 장애물경기가 모두였다.

이경철씨(72·전 영남고교사)는 "1911년의 운동회는 육상대회라고 하기에는종목 시설 등 모든 면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그렇지만 학생들뿐만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최초의 근대스포츠경기대회로 향후 지역육상 발전에서빼놓을수 없는 의미를 가집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트랙은 길이가 불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돌멩이와 흙무더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선수들이 제대로 달리기 힘들었다.

타임을 재는 것도 없었고 그저 여럿이 심판의 호각소리나 구두신호로 뛰어순위를 결정했다.

선수들은 대부분 맨발이었고 일부 선수는 한복에 짚신,미투리를 그대로 신고뛰기도 했다.

장애물도 지금처럼 규격이 갖춰진 것이 아니라 책걸상 그물 등을 아무렇게나두고 뛰어넘거나 빠져나오는 경기였다.

경기는 직장 학교 동대항으로 열렸고 이에 따라 응원전도 치열했다.학교 동마다 징 꽹과리 등이 동원됐고 이긴 팀에서는 선수와 관중들이 트랙으로 내려와 농악에 맞춰 춤까지 춰 농악마당을 방불케 했다.대회하이라이트는 동대항 릴레이경기.

이때쯤 동마다 펼치는 응원전은 최고조에 달해 달성공원일대가 온통 열기에휩싸였다.

선수를 따라 응원단이 트랙을 같이 뛰고 바통을 떨어뜨리면 응원단이든 관중이든 누구나 주워줬지만 반칙이 아니었다.

트랙안팎을 차지한 관중들이 응원하느라 코스까지 밀려나오는 통에 선수들은일종의 장애물경기처럼 그 사이를 뚫고 달려야 했다.

바통을 놓친 계주선수들은 인파를 헤치고 직접 바통을 줍거나 관중들이 찾아주면 받아달렸고 끝내 못찾으면 그대로 달려 순위를 인정받기도 했다.그외 두사람이 발묶어뛰기, 초롱을 든채 불을 꺼뜨리지 않고 달리는 제등경기등 육상종목에는 없는 일종의 오락경기도 가졌다.

시민대운동회를 계기로 각급 학교뿐만 아니라 일반에까지 근대체육과 육상에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체조시간에 육상 등 실기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학교마다 정식 운동부는 없었지만 방과후 일부 학생들끼리 모여 연습을 하는경우도 많았다.

보잘것없이 초라한 시민대운동회였지만 여기에서 진행된 육상경기는 지역육상으로서는 최초의 대회이자 대중보급의 계기가 된 셈이다.이후 각급 학교별로 운동회가 열리게 되고 육상이 학생들 사이에 폭넓게 보급되면서 향후 지역육상이 장기간 전국무대를 제패하는 근간이 형성되어갔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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