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전두환 전대통령의 사위인 윤상현씨가 미조지 워싱턴에서 박사학위를받은 '대중 관계에 특별히 초점이 맞춰진 한국의 북방정책'이란 논문중 관심있는 대목을 순서와 무관하게 요약한 것이다.▲박철언(이하 존칭 생략) 비밀 방북=박은 87년 여름 북경을 방문했다. 그는이보다 앞서 85년 10월 장세동을 수행해 북한에 가 김일성을 만났다. 이 방문은 그해 9월 이뤄진 허담의 서울행에 대한 답방 성격이었다.박은 6공화국에 들어서도 평양을 여러차례 비밀 방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영훈 당시 총리는 국회 답변에서 이같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박은 또 88년과 89년 북경과 모스크바를 방문해 노태우의 개인적 메시지를현지최고위 당국자들에게 전달했다.
노태우가 당시 아르바토프를 통해 고르바초프에게 전한 내용은 ①한소관계개선이 동북아 평화에 기여할 것이며 ②한국이 소련의 개혁을 지지하는 한편③소련이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편집자주=박철언의 성향 추적이란 항목이란 또 이렇게 되풀이 된다) 80년대중반 이후 박의 빈번한 비밀 방북은 (남북한을 재결합시켜야 한다는) 그의결의를더욱 굳게했다. 박이 좋아하는 삼팔선의 봄이란 노래가 이같은 마음을내비친다.
▲전두환·노태우 비교 분석=전두환은 집권 기간내내 그의 특징인 '군인처럼'이란 성향을 유지했다. 적과 동지를 분명히 구분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의리에 입각해 친구에게 대단히 관대했다.
따라서 친구인 노태우를 각별하게 배려했다. 이는 6.29 선언에서 잘 나타난다.
전두환은 선언문 모두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에게 이를 발표토록 해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반면 노태우는 달랐다. '정치인처럼' 행동했다. 그는 전두환과는 달리 적과동지간에 양다리를 걸쳤다. 노에게는 상황에 따라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거나 그 반대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였다.
정치 자금에 매우 인색했던 것으로 널리 알려진 그였건만 야당 의원의 자녀결혼식에 축의금을 내기도 했다.
노는 권익현에게 사전 통보조차 없이 그를 88년 4월 선거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역시 육사 동기생인 정호용에게 광주 문제의 모든 책임을 물어 의원직을내놓도록했다. 노는 또 집권한지 10개월도 못돼 전두환에게 설악산으로 스스로 은둔토록 강요했다. 노는 분명히 의리란 개념에 동감하지 않았다.노태우는 3당 통합을 위해 처음엔 김대중에게 접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노는 김에 대한 접근이 잘 안되자 이내 김영삼과 김종필 쪽으로 돌아섰다.그리곤 결국 뜻을 이뤘다. 전두환 같으면 한국 정치사상 초유인 집권당·야당간의 3당 통합은 상상조차 않았을 것이다.
노태우가 북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박철언과 김종휘에 크게 의존한 밀실 정치성향을 보인 것은 그가 군에 있을 때 정보 부문에서 오래 일한 것과 무관치않다.
어느 심리 분석가의 지적처럼 노태우의 '우유부단함'은 그가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판단을 유보하고 극도로 머뭇거리는' 그런 개인적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군생활중 전두환이 1번 바이올린을 켰다면 노태우는 분명히 2번 바이올린을연주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는 그 스스로의 것을 한 적이 거의없다. 많은 경우 조역이었다. 노태우는 보안사령관과 대통령직을 포함해 최소한 6번 전두환의 뒤를 이었다.
▲전두환·논문저자 면담 내용=(편집자주=93년 8월 8일 면담한 것으로 밝힘)전두환은 논문 저자와 개인적으로 면담하는 자리에서 노태우를 (후계자로)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노가 국가 안보에 중요한 군지식과 경험이 있으며 둘째 노의 온화한 성격이 민정 이양에 도움이 될 것이며 셋째 정부·당 및 올림픽 부문에서 그가보인 능력을 감안해서라고 말했다.
▲한·헝가리 수교로 한미 관계 한때 불편=박철언의 청와대 보좌관을 지낸모인사는 93년 8월 29일 이렇게 말했다. "이같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우리는 헝가리와 수교하려는 의도를 주한미대사관에 수교 발표 이틀전까지 고의적으로 늦췄다"
노태우 정권의 이같은 민족주의 성향의 북방 정책은 그러나 후에 한계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과 강한 연대를 유지하는 실용 노선을 취하는것이 보다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걸프전 때 미국을 돕기 위해 의료단을 파견한 것과미·베트남간 실종미군(MIA) 문제가 타결되기까지 대베트남 관계 개선을 유보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군부, 6공 북방정책 반발=민병돈 육사교장이 89년 3월 21일 노태우가 참석한 기념식 연설에서 북방 정책을 비판해 물의를 일으킨 바있다. 고명승은 93년 8월 9일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3군 화력 시범이 있기 약 1주일전 이상훈 국방장관으로부터 노태우 대통령에게 브리핑 할때 북방 정책을 지지하는게 필요할 것임을 시사하는 지시가내려왔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당시 이종구 육참총장과협의했다. 이총장도 내 입장에 동조했다. 브리핑이 끝난 후 놀랍게도 아무도나의 이같은 태도를 문제삼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고명승·이종구 두 장군이 전두환계라서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본인들도 자신들이 전두환계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당시 백담사에 가있던 상황이었던만큼 이같은 지적은충분한 명분이 되지않는다.
노태우는 이후 자신의 북방 정책에 반발하는 고명승 등을 거세했다. 이후 북방정책과 3당 통합에 대한 군내 반발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남북한 군사력 평가를 둘러싼 논문 저자와 전두환간 견해차=지난 89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방비는 80억달러로 세계에서 9번째로 많은 방위비를 쓴 것으로 돼있다. 북한보다 50억달러 이상이 많은 것이다.
전두환은 논문 저자와 회견하면서 주한미군을 설사 감안하더라도 한국의 군사력이 북한의 70% 수준으로 이들의 도발을 저지하는데 간신히 미치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숫자 하나만으로 한국의 군사력을 판단할 수는 없다. 여러 요인들이복합적으로 평가돼야 한다고 본다. 한국군은 북한에 비해 사기와 통솔력에서월등해왔다. 특수부대는 북한보다 특히 규모가 크다. 장비 또한 북한에 비해현대화 돼있고 정교하며 기술적으로 위이다.
남한은 70% 이상이 산악지대여서 방위에도 안성맞춤이다. 북한 지상군이 빠른속도로 진격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비록 지난 91년말 철수되기는 했지만주한미군의 전술핵도 남북한 군사력 차이에 영향을 미쳤다.걸프전 때 보여진 결과도 남북한 군사력을 숫자로만 파악해서는 안된다는사실을 뒷받침했다.
▲김영삼·박철언간 '승강이'=북방 정책을 둘러싼 김영삼과 박철언의 주도권다툼은 90년 4월 박의 정무장관직 사퇴란 결과로 이어졌다.두 사람간의 승강이는 90년 3월 모스크바 방문시 더욱 악화됐다. 박은 원래소련에 5월께 갈 생각이었다. 양측은 박철언이 김영삼과 '같이 가는 것'인지또는 그를 '수행하는 것'인지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이같은 마찰은 결국 당시 김영삼이 예정에 없이 고르바초프를 만난 자리에서노태우의 사신을 전한게 아니라 박철언이 중계인을 통해 이것을 고르바초프측에 넘기는 사태로까지 비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태우·소특사 비밀회동=노재봉과 김종휘는 한소 수교 당시 가장 중요한역할을 했다. 박철언은 이때 그간 유지해온 자신의 채널을 김종휘에게 넘겨주고 조역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소간 접촉 채널은 소노보스티 통신의 도쿄(동경) 지국에 나와있던 두나예프와 김종휘를 위해 일하던 안기부 고위 관계자였다. 이를 통해 한소 관계의결정적 계기가 된 노태우·노재봉·김종휘 3인과 소특사 도브리닌간의 비밀회동이 서울서 이뤄졌다.
안기부와 KGB를 매개로 한 청와대와 크렘린간 접촉채널은 효과적이고 신뢰할만 했던 것이다.
▲한중 수교 뒷얘기=김종휘는 (주)선경 사장이던 이선석을 통해 중국 최고지도층에 접근했다. 이의 상대는 공산당중앙위 정치국원이던 전기운의 지시를 받는2명이었다. 이는 논문 저자와 회견하면서 자신이 90년 4월부터 91년늦게까지 중계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한중 수교 협상은 한국쪽에서 김종휘·이상옥·김홍배(안기부 제2차장) 3인이 주도했다. 첫 예비 협상은 92년 5월 14~16일 북경에서 열렸다. 중국은한국에 '하나의중국'을 인정토록 요구했다. 정부는 이같은 요구가 있을 것으로 예상은 했으나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첫 협상은 결렬됐다.그해 6월 2일 북경에서 2차 접촉이 있었다. 정부는 이번엔 대만과 '최고의비공식 관계'를 유지하도록 해달라는 대안을 냈다. 중국은 난색을 표명했다.그러나 다른 면에서 진전이 있었다.
세번째 접촉은 같은달 20~21일 서울서 이어졌다. 정부는 한중 정상회담을조기성사시키도록 제의했다. 중국은 9월까지는 어렵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어 그해 7월29일 공식 회담을 통해 양측은 정상회담 일자 등에 합의하고 가서명했다.
이로부터 근 4주후 한중은 관계 정상화를 발표하게 된다. 중국은 이 기간중북한과 접촉해 한중 관계의 필요성 등을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논문 결론=정부가 불안정할수록 대담한 외교 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 정책이 중요하면 할수록 소수의 인사가 의사 결정 과정에관여한다는 것이다.
특히 6공의 북방 정책은 그런 성향을 보였다. 정책 결정에 관여하는 핵심인사들간에는 또 북방 정책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발판을 다지려는 성향이강함으로써 잡음이 빚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대외 문제와 관련해 전문적인 이해가 충족되고 또 일관성이 유지될수있도록 외무부가 정책의 근본적인 책임을 맡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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