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유도가 대구에 보급된후 80년이 넘도록 대구 경북은 유도 본향으로서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향토유도의 시조격인 유근수씨가 북구산격동 금호강변 모래사장에 유도장을연 것이 1910년.
일본 유도를 배워 일본을 이기자 는 젊은이들이 하나둘 몰려들며 싹트기 시작한 향토유도의 맹아는 극일 의 수단으로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특히 광복이후 오늘까지 50여년동안 지역유도는 경기력면에서만 보아도 전국의 각종 유도대회를 석권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무대를 휩쓴 숱한 강자들이 쌓아올린 전통은 마침내 올림픽 등 세계무대에서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향토유도가 세계제패의 선두에 설수 있었던 데는 선수 개개인의 자질과 연습외에도 빼놓을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선수지도에 일생을 바친 많은 지도자들의 피땀과 선후배간에 서로 이끌어주는 끈끈한 정, 최고의 연습상대이면서 라이벌인 동료들의 존재가 바로 그것.지도자 못지않게 선후배동료들의 역할이 큰 것은 한명의 최고선수가 배출되기 위해 비슷한 수준의 선수가 최소한 다섯명은 필요하다 는 유도계의 이야기에서 쉽게 알수 있다.
영남대 박성규교수는 "유도가 보급된 이래 대구지역최강자가 전국최강이라는공식은 변함없이 이어져왔습니다.강자들이 너무 많았던 까닭에 오히려 선수들의 전성기가 짧아지거나 빛을 보지 못하기가 일쑤일 정도였습니다"고 말한다.
이처럼 당대최고의 스타로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그에 버금갈만큼 한 시대를풍미한 선수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이 바로 향토유도의 저력이었다.60년대 영남고-영남대 전성시대를 이끌던 윤상진 채일포 윤창희 등은 50년대경찰유도의 뒤를 이어 지역유도의 맥을 이은 주역들.
50년대까지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온 학생유도는 이들에 의해 되살아나고 명실공히 전국최강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70년대 김대룡 박수경 김정길 박천복 등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선배들의 뒤를 이어 지역유도가 명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숨은 일꾼들이었다.74년 제3회 아시아선수권대회 73kg급에서 은메달을 딴 김대룡은 영남대유도부 출신.
대학부정상을 달리던 선배들 틈에서 성장한 그는 70년대초 주장을 맡으며 영남대유도부 전성기를 이어갔다.
73년 신설된 제1회 전국대학생개인체급별선수권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박천복 역시 영남대로서는 보물같은 선수.
이들 직전에 활동한 영남고출신 이창수의 유도실력 또한 막강했다.윤공화씨(경북유도회부회장)의 회고다.
"당시 전국최강은 재일교포출신 김의태선수로 일본에서도 인정하는 최고수였습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도 그를 만나면 순식간에 한판으로 끝나버렸지요. 이창수는 김의태가 한판으로 꺾지 못한 유일한 국내선수였을만큼힘과 기술이 뛰어났습니다"
80년대들어 지역출신선수들은 올림픽 세계선수권 등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향토유도의 명성을 높이지만 그들외에도 유도사에 남을만한 선수들은 부지기수다.
영신중 재학시절 유도에 입문한 구회영(현 경기대감독)은 81년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낸 후 영신고교사로 부임, 영신유도를 정상에 올린주역.
영남대출신 이종우 이한 윤진화 이현근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선수들.86년 세계대학생유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선수를 누르고 71kg급에서 우승한이종우는 업어치기와 발기술의 명수.
같은대회 78kg급에서 은메달을 딴 이한은 88년 소련 트빌리시대회에서는86kg급에 출전,동메달을 따낸 전천후선수로 잘 알려져있다.60년대후반부터 전국을 석권한 윤공화와 함께 형제유도인으로 유명한 윤진화역시 86프랑스오픈 세계청소년선수권 87서독오픈 89국제군인유도선수권 등에서 정상권에 오른 선수.
이밖에 이루 헤아릴수 없는 강자들이 향토유도의 맥을 이어나갔고 지금도 이들의 뒤를 이어 많은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유도인 출신이 아니면서도 유도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해 평생에 걸쳐 대구유도회의 살림을 맡고 있는 이양모 사무국장의 언급에서 향토유도의 발전이유를 짚어볼수 있다.
"전통은 언제나 이어지는 부분과 끊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이 가운데어느쪽에 더많은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발전과 쇠락이 결정된다면 지역유도는 이어지는 쪽에 쏟은 노력이 훨씬 컸다고 할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