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5일 일제에 의해 자행된 '제암리 양민학살사건'은 '화수리 만세운동'등 당시의 수원군 우정·장안면 일대 주민들이 벌였던 조직적 항일운동이 직접적인 원인이 돼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또 이 만행은 '수원수비대'가 아니라 '안성수비대' 소속 일본군들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서지학자 이종학씨(68·수원시 장안구 화서동)가 지난해 11월일본의 도서관 등지에서 새로 입수한 '조선소요경과 개요',조선주둔 헌병사령관이 일본 대신에게 보낸 '전보문' 등 관련 자료에서 밝혀졌다.3.1운동 후인 대정 8년(1919년 9월)에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조선소요 경과개요'라는 문건에는 제암리 사건의 원인에 대해 "수원군 우정·장안면 등지의 2천여 '폭민'들이 화수리 순사 주재소를 습격,순사부장 천단풍태랑을 살해한 것을 발단으로 일본군 안성수비대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제암리로 가서 주민 20여명을 살상하고 촌락 대부분을 불질렀다"고 밝히고 있다.또 조선주둔 헌병사령관이 일본 대신(육군대신으로 추정)에게 보낸 전보문도"수원,안성 등지의 주민들이 주재소 순사를 처단하는 등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없을 정도로 광폭·영악(영악)했기 때문에 보복심이 발동한 검거반군인들이 주민들을 살상했다"고 적고 있다.
이 전보문은 또 "이 지역 주민들에 대한 학살 및 방화 사건과 관련,검거반지휘관을 문책하고 병사들에게는 교양을 실시했다"고 밝혔다.이밖에 일본 동양학회에서 발행한 '동양시보'라는 사료도 "주요 외신들이 무참한 폭거로 보도한 '제암리 사건'은 이곳 주민들이 주재소를 불태우고 순사를 무참히살해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며 일본군의 정당방위를 주장하고있다.
이처럼 새로 발견된 세 문건은 모두 '제암리 학살 사건'이 수원군 우정·장안면일대의 조직적 항일운동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그동안 '제암리 학살사건'은 △마을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점 △4월5일의 '발안장 만세사건' 등으로 인해 발단된 것으로 추정돼 왔을 뿐 전후의 인과관계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있었다.
또 학살의 주범도 수원에 본부를 둔 일본군 제20사단 병사들인 것으로 알려져있었다.
이에 따라 '제암리 양민 학살 사건'을 둘러싼 수원군 우정·장안면 등 지역의 '화수리 만세운동' 등 항일운동에 대한 역사는 다시 기록돼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들 자료를 발굴한 이씨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각 지역별로 독립운동 지역에대한 성역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나 '화수리 사건'등 이 지역 항일운동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며 "이번을 계기로 이 지역의 항일운동이 올바로 평가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갈때인 1919년4월 15일 제암리 주민 24명을 교회 안에 몰아 넣은 뒤 불을 질러 무참히 학살했다.
또 이 마을 가옥 33채중 2채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 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