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전파에 실은 삶의 애환

입력 1995-02-24 12:17:00

"땍띠, 땍띠이"우리 방송사에서 몇손가락에 꼽히는 인기 프로그램 '여로'의 바보주인공 장욱제가 자신의 부인 태현실을 부르는 소리였던 이 말은 당시 어린이들이 앞다투어 흉내내던 '유행어'였다. 전통적인 우리 가정을 배경으로 고부간의 갈등을 그린 멜로드라마 '여로'는 방영시간이면 밥을 태우거나 도둑을 맞는 집이 부쩍 늘었다는등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며 국민들을 울리고 웃겼다. 방송은 '청실 홍실'에 넋을 뺏긴채 '아씨'와 함께 눈물짓고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를 부르며 울부짖던 우리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성장해온것이다.

45년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을 도쿄로부터 중계방송한 후 미군정청이 경성 중앙방송국을 접수하면서 태어난 우리방송은 혼란스러운 사회상황과 전쟁등으로 인해 50년대 초까지 제대로 된 방송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초기 방송의 대명사였던 라디오는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보급이 부진해 48년18만5천대의 라디오가 있었고 10년이 지난 59년에도 전국적으로 겨우 31만여대가 보급되었을 정도로 청취자수의 증가치는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라디오도 귀한물건*

당시 라디오가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는가를 잘 말해주는 일화가 바로 저 유명한 KBS 대구방송의 '만우절 라디오 증정사건'이다. 55년 4월1일 오전 '음악과 화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아나운서 이교석씨는 "누구든지 먼저방송국으로 오시는 분에게 라디오 한대를 선사하겠다"는 귀에 번쩍 띄는 안내를 했 다. 만우절을 기해 '방송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농담삼아 한 말이었다. 몇사람이 라디오를 받으려고 달려왔지만 전후 사정을 듣고는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칠곡군에서 택시를 대절해서온 실명용사들은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만우절이지만 공영방송이 거짓말을할 수 있느냐"며 방 송국 앞마당에서 농성을 벌였고 결국 이씨는 징계를 받고 말았다.

"라디오가 하도 귀한 시절이라 생겼던 희극적인 비극이지요. 요새 선물로 라디오 준다면 누가 좋아하겠어요"라는 이씨의 말처럼 57년이 돼서야 국산라디오가 제대로 생산될 정도로 라디오는 귀했다.

또 엄청난 영향력때문에 방송은 언제나 정치권력의 주목대상이자 때론 이용도구가 되었다. 6.25전쟁때 대전에서 대통령의 서울 사수의사를 발표한 것도, 5.16당시 가장 먼저 '혁명공약'을 읊었던 것도 방송이었다. 정부의 통치논리에 의해 큰 명분없이 방송사가 생겨났다 통합되거나 갑자기 사라지는 경우도 쉽게 찾아 볼수 있다.

*영향력탓에 수난도*

"동네에서 좀 산다하는 집에 라디오를 들여놓으면 재미있는 프로를 할 시간에 온 동네사람들이 그집 마당에 둘러앉아 라디오를 들었지"청도가 고향이라는 김수자씨(61)의 말처럼 라디오가 귀했던 만큼 그 청취형태 역시 집단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경제성장과 함께 보급이 늘면서 MBC라 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등 라디오는 70년대 TV가 대중화되기까지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는 방송매체로 자리잡았다.

TV의 등장은 이제껏 라디오라는 청각위주의 방송에 익숙해 있던 청취자들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금방 대중화되지 못한 TV는 62년 초 수도권지역에 2만여대가 보급되었을 정도여서 인기 프로그램 방영시간이면 다방이 붐볐고 어린이들은 만화가게에서 돈을 내고 TV를 봤다.초기 TV는 녹음시설이 제대로 되지 못한탓에 발달된 방송기술과 긴장감이 요구되는 '생방송'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하곤했다. 심지어 드라마나 광고도곧 잘 생방송되어 주인공이 대사를 잊어버리면 멍하게 앉아있는 모습까지 죄다 방송되는 경우도 있었다.

*광고까지 생방송*

열악한 전기사정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60년대 말 대구 MBC는 현재 중동교 근처인 수성천변에서 '도민위안공연'을 열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등이 출연한다 해서 모여든 시민이 수십만. 드디어 방송시간이 됐는데 갑자기 스피커는 꿀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다. 예고없는 정전으로 정적이 계속되자 관객들은 급기야 돌멩이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경찰이 관중들을 해산시켰지만 당시 현장에서주운 고무신만 두가마니였다니 그때의 상황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이후 77년 3백50만대, 78년 5백만대로 TV 보급대수가 늘어났고 80년에는 컬러방송이 시작되면서 방송은 날로 화려하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광복 50주년을 맞는 올해는 기존의 공중파 방송과는 성격을 달리하는케이블TV와 지역민방이 출범, 지금까지 방송환경의 변화와 맞먹는 격변기로접어들 전망이다. 이제 컴퓨터등 첨단기기들과 결합한 방송은 단순히 웃고즐기는 오 락도구가 아닌 정보제공의 원천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정보제공 자리매김*

경북대 박기성교수(신문방송학)는 "우리나라 방송은 국가기관의 지배논리에입각해 운영되던 '국가주도형 방송'이었다"면서 "향후 방송은 권력이 아닌삶 의 차원에서 인식, 발전되는 공기가 되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김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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