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럽-과거지우기

입력 1995-02-02 08:00:00

엊그제는 설이었다. 설음식과 함께 신문과 TV를 보면서 오랜만에 명절연휴를망중한으로 보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명절때마다 '과거'가 숨쉬고 있는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해야 하는것일까. 연휴의 시작에서 끝까지 고속도로의 교통사정을 지켜보면서 문득 까맣게 잊고 있었던 민족과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역사는 망각아닌 기억**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만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했던 것에 대한 기억이자 망각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사가들의 사관이 큰비중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역사의식이란 망각할 수 없는 사실들에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 인식의 바탕위에서 미래에 도래할 신세계를설계해야 한다.

우리가 부끄러운 과거, 반추하기 싫은 어떤 사실을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선상에 서서 없었던 일처럼 지워버린다고 해서 흑판글씨처럼 지워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침표가 되지 못하고 새로운 근심을 유발하는 의문부호로 남게 된다. 또 존재했던 물건이나 사실을 부수고 치워버리는 행동은 역사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우매함이거나 반역사적일 수 밖에 없다.

개인에 있어서도 과거를 '과거'로 받아들여 불행한 일생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추악한 과거까지도 '추억'으로 승화시켜 아름다운 생을 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과거지우기'는 '홀로서기'의 반대개념으로, 있었던 일을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는 당당치 못함이며 양심을 속여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황당함이다. 역사를 박제하여 기념관의 유리틀속에 모셔둔들 누가 관람하고 누가 감동할 것인가. 부질없는 짓이다.

**구총독부 철거 부당**

문민정부는 구총독부 건물을 오는 8월15일 기어이 철거하리라 한다. 전문가들과 지성들이 반대하고 있음에도 역사에 누가 될 계획을 왜 강행하려 하는걸까. 당초에는 철거의 극적효과를 노려 일왕의 항복선언을 녹음방송하면서폭파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통쾌할 것 같지만 치기어린 발상이다.이 건물은 우리 민족에겐 수치와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불쾌한 건물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더러운 역사라도 부인하거나 외면해선 안된다. 똑똑히 기억하여 다시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 폭파및 항복문서 낭독이란 상징조작으로 얻어지는 가짜 승리의 도취감이 우리 민족의 암울한 감정을 카타르시스 할 수 있단 말인가.

역사적 건물은 그것이 수치의 소산이든 영광의 상징이든 그 소유주는 국민의뜻을 총체적으로 결집시킨 국가이지 어느 한 시기에 정권을 잡은 일부 세력들의 소유물은 아니다. 그러한 문화유산은 신뢰할 수 없는 여론조사의 결론으로 파괴되거나 훼손되어선 절대로 안된다. 현 정권이 국민투표에 의해 창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 줘야 할 교훈적인 유산을 감히깨뜨릴 권리는 아무데도 없다.

**파괴는 기소유예 안돼**

런던탑에 가면 영국의 통치사에서 수치스러운 사건들을 숨김없이 진열하고있다. 치욕스런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인도도 영국의 식민지 통치시절의 쓰라린 기억들을 유물로 전시해 두고 있다. 필리핀의 세부섬에 가면 원주민들에게 맞아 죽은 마젤란선장의 기념비가 서 있다. 이 비석에서 50m 상거한 곳에는 원주민 추장 막탄이 세운 '라푸라푸와 그의 부하들은스페인의 침략자 마젤란을 죽임으로써 서구 침략을 몰아낸 최초의 필리피노가 되었다'는 기념비를 세워두고 있다. 구총독부 건물을 때려 부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정서로선 이해할 수 없는 현장이다. 왜 우리는 지배자와피지배자의 대립되는 두 모뉴망을 마주 세워두고 볼 수는 없는가.구총독부 건물의 해체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집권의 권위를 파괴의 미학으로보여 주어서는 안된다. 역사앞에서 죄인이 되지 않으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정치를 간혹 잘못한 죄는 덮어줄 수 있어도 문화유산을 파괴한 죄는 광주사태의 판결처럼 유예되지는 못할 것이다.

〈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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