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체육의 맥-유도

입력 1995-01-11 08:00:00

67년 12월 대구대와 청구대가 통합, 새롭게 출범한 영남대유도부는 그야말로전국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게 됐다.대구대는 통합직전 11월에 열린 제17회 전국학생유도대회에서 윤수균 정이수설옥현 등 호화진용으로 우승을 차지한 막강팀.

여기에 청구대의 실력자 윤중희 양영돈 등이 가세한 영남대 유도부는 68, 69년에 열린 18, 19회 전국학생유도대회 정상에 올라 이 대회 3연패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당시 영남대 유도부 주전들은 모두가 전국정상급이었지만 이 가운데 설옥현은 기술보다 투지가 크게 앞선 케이스.

66년 입학, 윤복균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실력이 급성장한 설옥현은 단체전뿐만 아니라 각종 개인전에서도 우승을 휩쓸며 80kg급 최강자로 군림했다.설옥현의 주특기는 허벅다리 밭다리 등 다리기술이었지만 승리의 원동력이된것은 기술이 아니라 어떠한 상대에게도 물러서지 않는 투지였다.그는 팀이 고비에 몰릴때마다 오히려 적극적인 공격으로 호쾌한 승리를 거두며 팀 사기를 높여 전국학생유도대회 3연패의 실질적인 주역이 됐다.설옥현이 이처럼 향토유도의 명성을 높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중구 동인동 무덕관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설옥현이 유도를 쉽게 접한것은 당연한 일.

대구중학교에 진학한 설옥현은 향토유도의 거목으로 꼽히는 서경득선생의눈에 띄어 제대로 유도를 배우기 시작, 얼마 지나지 않아 윤중희 등당시 중등부최강자들과 어깨를 맞댈만한 실력자로 떠오른다.

전국최강을 자랑하던 영남고 유도부로 진학, 유망주로 기대를 모으던 설옥현은 2학년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유도를 그만두게 된다.

고교졸업과 함께 진로를 고민하던 그에게 영남대코치로 갓 부임한 윤복균이영남대로 진학할 것을 권유, 특기생으로 입학하면서 제2의 유도인생이 시작된다.

영남고 선배이자 유도의 우상으로 존재하던 윤복균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의성장에 최고의 촉진제가 됐고 설옥현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설씨는 "복균이형이 아니었으면 유도를 다시 시작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진학은 꿈도 못 꾸었으니까요. 입학후 너무나 기쁘고 고마워 이를 악물고 연습에 몰두했습니다"고 당시를 회고하며 감개무량해했다.

윤수균 정이수 등 최고의 기량을 갖춘 선수들과 매일 연습을 함께 할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는 더없는 보탬이 됐다.

이후 그는 출전하는 대회마다 연전연승, 영남대유도부의 간판선수로 부상했다.

그가 4학년이던 69년 제19회 전국학생유도대회때의 일이다.대학부에는 대회를 2연패한 영남대를 비롯, 한양대 동아대 등 9개 대학이 참가해 어느 해보다 치열한 경기가 벌어졌다.

서울과 부산의 유도세가 급격히 성장한 당시로는 영남대의 대회3연패를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

준결승에서 서울의 명문 한양대를 5대0으로 격파한 영남대는 결승에서 부산의동아대와 맞붙게 된다.

동아대는 경남유도의 실력자들이 즐비한 팀으로 연세대와 성균관대를 가볍게제압하고 결승에 진출,우승을 향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3연패를 노리는 영남대와 이를 저지하고 패권을 차지하려는 동아대와의 결승전은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접전이었다.

불꽃튀는 명승부가 계속됐고 스코어는 2대2. 마지막 경기인 주장전에서 승부가 판가름나게 됐다.

동아대 주장 천흥대와 영남대 주장 설옥현의 대결.

초반부터 설옥현은 특유의 투지를 앞세워 적극적인 공격을 시도했으나 천흥대의 수비가 만만치않아 경기는 후반까지 백중세.

지칠줄 모르는 설옥현의 끈질긴 공격이 계속되고 방어에 급급하던 천흥대는결국 밭다리후리기에 걸려 무릎을 꿇고 만다.

이로써 영남대는 대회3연패의 위업을 달성,향토유도의 명성을 다시한번 입증했다.

대학졸업후 설옥현은 우수선수로 코오롱에 입사,경북대표선수를 거쳐 경북대표팀 코치로 활약했다.

75년 현역에서 은퇴한 설옥현은 우연히 81년 제62회 전국체전에 다시 나서게된다.

대구와 경북의 분리로 대구대표팀에 이렇다할 선수가 없자 대구유도회에서그에게 출전을 권유한 것.

대구대표팀은 초반에 한수 위인 경북대표팀을 만나 4대3으로 아깝게 탈락했지만 설옥현이 벌인 시합은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됐다.

주장을 맡은 설옥현의 상대는 당시 국내정상권을 달리던 배완섭.노장 설옥현은 은퇴한 선배를 만나 방심하던 배완섭에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빠른 다리기술을 구사,순식간에 한판승을 거두었다.

"너무 오랜만에 매트에 선데다 열살난 아들까지 관중석에서 응원을 보내고있어 무척이나 긴장됐습니다. 박수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긴줄 알았지요"설옥현의 승리는 대구팀에게는 체면을 살린 한판이 됐고 그에게는 평생 잊지못할 마지막 시합이 됐다.

설옥현은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뛰어났다.

대구상공회의소팀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하던 86년 전국직장대항유도대회때의일.

대구상의팀은 결승에서 대부분이 국가대표로 구성된 실업최강 쌍용과 맞붙었다.

시합이 시작되자 설옥현의 지도에 따라 기술보다는 투지를 앞세운 적극적공세를 보인 대구상의는 완패하리라던 예상을 깨고 접전끝에 쌍용을 제압,감격어린 우승을 차지했다.

무명의 선수들로 구성된 대구상의의 우승은 향토유도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쾌거로 유도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지도자에서 물러난 후에도 설옥현은 향토유도발전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현재 대구유도회 전무이사로 활동중이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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