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권 수립 비사 레베데프 비망록

입력 1995-01-07 08:00:00

*5월17일*1946년에는 1개의 의과대학, 2개의 교원대학, 그리고 현재 3천3백37명이 공부하고 있는 1개의 종합대학이 문을 열었다.

1947년 9월1일부터 공업대학 교원대학이 문을 열 계획이며, 그 학생수는 6천3백명에 달할 예정임.

*5월19일*

이른 아침 쩨렌찌 포미치(주:스티코프)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로 첫번째군용열차를 보내고 내일 모든 대표들을 보내라고 말했다. 나는 13시에 첫 열차를 보냈다.

낮에 스티코프와 뚠킨이 도착했다. 대표를 아침에 서울로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시간은 한 시간 앞당겨졌다. 즉 서울에 5월20일 15시15분에 도착하여하지(주:주한미군사령관)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9시에 출발하기로한 것이다.

*5월20일*

이른 아침 6시에 쩨렌찌가 전화하여 나를 급히 불렀다. 여기에서나, 발라사노프, 꼬르꾸렌꼬, 그리고 나머지 기술진과 비서진은 기차로 가고 그와 뚠낀은 비행기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밤에 몰르토프(주:소련 외무상)가 전화로위원회 업무에 대해 지시했다.

(주:발라사노프:소련 주일대사 역임. 제25군 정치고문. 제1, 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소련측 고문으로 참석했다.)

9시에 예정대로 평양을 출발했다. 우리 대표단을 전송하기 위하여 많은 단체와 학교의 대표가 모여들어 군중집회가 개최되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김달현이 연설했다. 조선의 브존느이(내전 당시 유명한 적군 지휘관),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의 콧수염은 러시아 브존느이 같았다. 스티코프가답사를 했다. 아이들이 꽃을 선사했다. 꼬르뜨꼬프, 샤닌, 그로모프, 이그나치예프 등이 배웅을 나왔다. 모든 것이 엄숙하고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주:김달현=북조선청우당 위원장)

호각이 울리고 디늘까와 작별을 하고 우리는 출발했다. 가는 도중 지나는 역마다 예외없이 깃발과 손수건을 든 학생들과 마주쳤다. 첫정차역인 사리원에서 만세를 외치며 군중대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사진과 꽃들이 보였으며 인민위원회 및 정당 대표들이 나와 있었다. 또다시 꽃 증정이있었고 10분간 정차…신원역에서 다시 군중대회. 소비에트대표단을 만나기위해 나온 많은 여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축사와 꽃의 물결이 일고, 이러한 일들이 38선까지 계속되었다.

38선 이후로는 풍경이 아주 달라졌다. 첫 정거장에 기차가 들어서자 경찰이경계를 폈다. 아무도 기차에 다가서지 못했다. 이러한 광경이 서울까지 계속되었다. 오직 경찰만이 있었다. 기차가 오기만 하면 경찰이 에워쌌다. 작년에 비해 경찰의 수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역마다 오래 머물렀다.서울역에는 45분이나 늦어 오후4시에 도착했다. 정거장 플랫폼에는 종군사진사, 영화촬영기사가 있었다. 미국 위원회측의 일원인 웨커링 장군과 랭던이마중나와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3분정도 서있었다. 광장에서는 군악대가행진곡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광장에는 도열한 경찰과 미군들 이외에는 텅비어 있었다.

(주:랭던:미군정에 파견된 미국무성 고문.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개최시 소련대표단은 많은 사람들의 환영속에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제2차 미소공동위 때에는 별로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우리앞에서 미군이 탄 장갑차와 지프가 선도했다. 역에서 영사관으로 가는모든 길에는 경찰이 도열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경찰들은 서로 10~15보 간격으로 서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서울에 왔다. 영사관에 도착하자 일류신 47호가 하늘에 보였다. 스티코프가 탄비행기이다. 시티코프는 5시에 영사관에 도착했다.

*5월21일*

2시에 덕수궁에서 공동위원회의 개막행사가 열렸다. 개막식에는 미군측 장군들과 미국, 프랑스, 중국 영사들, 그리고 우리측 연락장교들이 참석했다. 군정장관과 군정의 각 부처장, 그리고 군정내 조선인들도 참석했다. 스티코프와 하지는 포옹을 나누고, 또 다시 사진·영화 촬영이 있었다.(주: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이날 덕수궁 석조전 회의실에서 개막식을 가졌다)

*5월22일*

첫 실무회담. 의사일정을 정했다. 미국측에서는 위원회에 정당 사회단체 대표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관련 당사자들도 참석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을 들고 나왔다. (우리는)그들에 포섭된 앞잡이 정당 사회단체들을 제외하고 싶었다. 우리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도 그 문제에서 손을 뗐다.이어 미국측은 이전의 결정 3에서 정치강령에 대한 구상을 취소하고, 장차수립될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권력이양에 관한 새로운 항목을 설정하자고제안했다. 그들에게 불리한 정치강령을 의사일정으로부터 제외시키기 위해그들은 심지어 강령에 관한 의제에 합의된 적이 없다는 술책까지 부렸다. 그들에게 이전 회의에서 그 기록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1946년 4월27일 회의록기록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미국측의 이 수정안은 철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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