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데프 비망록 해설

입력 1995-01-04 08:00:00

1946년 말에서 1947년초에 이르는 동안 소군정은 북한에서 정식 정권기관을만들어내기 위해 각종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그나치예프가 여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제2차 미소공위에 대비하기 위해 북한에서 이미 치러졌던 각종 선거와 관련된 일련의 통계들에 관한 정리 내용들이다.우선 북한은 1946년 11월 3일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방식은 북조선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에서 공동으로 추천한 후보에 대해 찬성자는 백함에, 반대자는 흑함에 투표하는 흑백함 선거였다. 물론 흑백함선거는 투표의 비밀을 보장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투표자에 대한 감시보다는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문맹때문에 그러한 방식이 채택되었던 점도 있었다. 비망록의 통계를 보면 공동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나타나 있었지만, 반대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해방직후 북한정권과 갈등이 많았던 기독교인들의 반대가 심했다.

아무튼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통하여 북한에서는 3천여명의 인민위원들이 선출되었다. 1947년 2월 24, 25일에는 리(동)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되었다.(이그나치예프의 보고에는 3월에 치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리(동)인민위원회 선거는 2월에 치러졌다). 이를 통하여 리(동)인민위원 5만여명이선출되었다. 이어 3월 5일에는 면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1만여명의 면인민위원이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북한에서 1947년 3월 현재 각급 인민위원회 선거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한편 각급 인민위원회 선거가 이같이 실시되고 있는 사이, 1947년 2월17~20일에는 도, 시, 군 인민위원 3인중 1명꼴로 뽑힌 대표들과 각 정당 사회단체대표 각 5명씩의 대표들로 구성된 북조선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인민위원회 대회는 인민회의(국회에 해당)를 구성하기 위한 모임으로, 2백37명의 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여기에서 선출된 인민회의대의원들은 인민위원회 대회 직후인 2월 21~22일 제1회 북조선인민위원회를개최, 북조선인민회의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어 북조선인민위원회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1946년 2월에 선거없이 임시적으로 구성되었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7년 2월에는 그 '임시'자를 떼고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정식 정권기관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이그나치예프가 보고하는 것은 각급 인민위원회 선거로부터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성립되는 바로 이같은 과정에서 각 정당 및 선거와 관련된 각종 통계에관한 내용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노동자, 농민, 그리고 사무원의 비율이 대단히 높다는 점이다. 이는 해방 직후 혁명적 과정을 거쳤던 북한에서 지주등과거의 지배층이 몰락하고 과거의 피지배층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고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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