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방적공장'실패*76년 설립된 갑을방적은 창업주인 박재갑회장에게 '섬유업의 단맛'이 과연어떤것인지를 똑똑히 가르쳐주었다.
가동 첫해 16억원의 순익이 떨어지자 이듬해 당장 시설을 배로 늘렸다.때마침 불어닥친 면방업의 호황을 타고 70년대후반 갑을방적은 그야말로 '황금알'로 변신했다.
갑을방적의 이같은 눈부신 실적으로 인해 갑을은 비로소 지역섬유업계의 선두그룹 자리를 굳히게된다.현재까지도 면방이 갑을그룹의 주력사업으로 남아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갑을방적에 재미를 붙인 박회장은 또하나의 엄청난 결심을 하게된다.5만추나10만추의 규모가 아니라 20만추규모의 세계적인 방적공장을 만들어보자는 욕심이었다.현재 갑을협업화단지 부지인 경북영천에 당장 12만평을 확보하고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다.그런데 70년대말부터 면방업이 갑자기 시들해지기시작한것이다.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사이 정권이 바뀌었다.5共정권은 비업무용토지 환수조치를 들고나왔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박회장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고 이래저래 영천부지대부분을 당국에 넘겨줄수 밖에 없었다.이렇게 박회장의 두번째 큰결심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박회장이 면방업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를 알수있는 대목이다.
*주위평 '너무짜다'*
박회장은 한마디로 '강단'으로 뭉쳐진 기업인이었다.구릉지를 허물어 손수공장부지를 만들고 손가락이 잘리면서까지 섬유기계를 수리해 기업을 일으킨만큼 의지는 대단한 인물이었다.그러나 사업에만 몰두하다보니 자연 주위로부터 '너무 짜다'라는 평을 받기도했다.박회장의 '짠'부분에 대한 얘기는 수도없이 많다 '함부로 쓰지않는' 창업세대의 체질은 당시로서는 당연할 수도있는 것이었지만 너무 짜다보니 더러는 흉허물이 되어 남아 있다. '에피소드'로 "골프장에만 다녀오시면 뭔가 호주머니에 가득 채워져있었는데 알고보니티샷때 허리가 부러진 나무' 티'를 주워오신거예요.그런데 그것을 밤새도록칼로 끝부분을 뾰족하게 깎아 숏티로 만드는 거였어요.물론 손수 만든 숏티를 골프장에 갖고가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렇게 버려진것이 아깝게 느껴졌나봐요.깎아만든 숏티가 지금도 항아리 가득 차 있읍니다"장남 박창호회장의회고담이다. 이러한 박회장의 '짠'체질은 갑을그룹이 국내 굴지의 섬유회사로 성장할때까지 변함이 없었다.그래서 박회장 사후 동생 박재을회장이 형님의 이같은 불명예(?)를 씻어주기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은 유명한얘기다.
*'인수·신설'확장 계속*
갑을방적때문에 대기업으로 면모를 갖춘 박회장은 중동지역에 특별한 관심을기울여 갑을건설도 만들었다.중동건설붐을 노려 당시 무명이었던 신성건설을인수,갑을건설로 바꾼것은 78년11월이었다.갑을건설은 우연히 만들어진것이아니다.갑을방적을 지을때 박회장은 중장비를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해왔다.당시에는 대구지역에 중장비가 별로 없었을뿐 아니라 야산을 18m나 깎아야했기 때문에 중장비를 직접 구입한 것이 계기가 됐다.
같은해 12월에는 강철못 제조회사인 동아공업을 인수,새식구로 맞아들였다.동아공업은 갑을방적과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회사인데 경영이 부실하다는소문을 듣고 즉시 경영권을 넘겨 받았다.지금은 (주)갑을금속으로 바뀌어 콘크리트 특수못을 제작하고 있으며 연간 2백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는 착실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에앞서 75년에는 가득상호신용금고를 매입, 금융업에도 손을 댔다. 현재의갑을금고.
79년에는 서울 용산구 갈산동소재 10층건물을 사들여 서울사무소로 만들었다. 화려하거나 규모가 큰 건물은 아니지만 서울에 이렇다할 빌딩을 갖고있지않는 지역섬유업체들은 서울에 들락거릴때마다 이빌딩을 보고 부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76년이후 불과 4년만에 다섯개의 회사를 인수, 신설하는 눈부신 진군을 계속했다. 81년에는 비산염색공단내에 월1천야드의 화섬직물을 염색할수있는 비산염색공장도 설립했다.
박회장은 닥치는대로 기업을 확장한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그러나 재갑씨의이러한 행군도 80년들어 제2차오일쇼크를 만나면서 주춤하게된다. 국제원자재값 급등과 국내정치의 불안은 또한차례 박회장을 괴롭히게된다. 특히 원면시세의 앙등은 주력기업인 갑을방적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81년에는 회사설립후 최초로 35억원의 손실을 봐야했고 82년에도 22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골프계에도 명성*
설상가상으로 이 중요한 고비인 81년 박재갑회장은 위암을 선고받고 사실상경영에서 손을 떼야했다. 그때까지만해도 갑을그룹 일선에서 서류가방을 들고 세계를 뛰어다니던 재을씨가 대구 본사로 내려와야만 했다. 다산 박재갑씨는 결국 예순을 넘기지 못하고 82년12월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날때까지 박회장은 골프에 심취했다. 젊은시절 화투를 즐기는 박회장을 보다못한 동생 재을씨가 외국여행길에 들고온 골프채를 형님에게 쥐어줬더니 그후로는 골프이외에는 눈도 돌리지 않을 정도로 빠져들었다고 한다.'끝장을 보고야마는'박회장의 성격은 골프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10년을매일같이 새벽마다 앞산 캠프워커에서 피칭연습을했는데 1백m에서 공 1백개를 치면 90개이상이 '온 그린'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마치 기계같았어요"당시 박회장의 볼보이 노릇을했던 3남 박명호씨의 회고이다. 박회장은 결국 골프계에 명성을 날리고만다.74년 동래골프장 개최 아마추어 선수권골프대회에서 우승을 하더니 81년에는제14회 전국 클럽대항 선수권대회 개인전에서 3위를 차지했다. 골프처럼 사업에도 엄청난 집념을 보인 박회장이었지만 그가 없는 갑을그룹은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박회장 사후 3년뒤인 85년, 갑을그룹은 박재을회장과 박창호사장체제로 나뉘어져있었다. 박창호씨는 이미 (주)갑을, 갑을방적(주)등 주력기업의 대표를맡고있어 그룹의 세력분할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룹의 두바퀴인 재갑,재을형제가 내것 네것없이 20여년간 혼신을 기울여 이룩한 기업이었지만 세월의 물줄기는 역시 '과거지사'에는 무관심했다.
*재산분배로 분가*
87년 12월, 갑을그룹은 마침내 '큰집''작은집'으로 분가를 하고만다. 겉으로드러난 동기는 경영합리화였지만 재산분배는 이미 정해진 수순. 큰집 작은집을 주식비율대로 배분하되 재을씨가 주로 서울에서 활약했으므로 그쪽지역은작은집 차지로 하자는 분배 대원칙이 세워졌다. 분가 결과 큰집 작은집의 재산비율은 대체로 6대4정도였다.
당시 갑을분가는 지역에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대기업의 분가처럼 법정소송같은 큰잡음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게 업계의 평이다.그러나 재산분배로 인해 큰집 작은집의 우애가 옛날같지 않음은 사실이다.큰집의 박창호회장은 이후 고 박회장과 비슷한 스타일로 엄청난 변화를 시도한다. 88년에는 갑을기계(주)을, 89년에는 갑일전자(주)와 신한화섬(주)를설립했다. 같은해 영남일보를 인수하더니 그해11월에는 스리랑카 최대 면방적공장을 인수, 갑을랑카를 설립했다. 93년에는 중국에 갑을연길방직 유한회사도 설립했다.
올 5월에는 지역상공인들이 지역발전을 위해 힘들여 만든 조선생명보험을 독점했고 7월에는 갑을개발(주)까지 설립, 거의 모든 업종에 참여할만큼 장남의 기업욕심은 선대를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갑을은 이제 많이 성장했다. 성장한만큼 지역을 돌볼수있는 여유도 가져야한다"고 충고하고 있기도 하다. 묘한 것은 지금 큰집의박창호회장이 작은집의 고 박재을회장 스타일을 닮아 해외시장개척에 주력하고있다는 사실이다. 풍운아같은 삶을 살며 대기업을 이룩한 창업주 박재갑회장은 오늘도 (주)갑을 정문에 흉상으로 남아 2세 경영인의 수성을 지켜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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