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악성-세모의 기도

입력 1994-12-29 00:00:00

겨울나무는 모든 것을 털어버린다.잎도 열매도 아낌없이 비우고 나목의 빈 모습을 감추려들지도 않는다.비울때가 되면 비울줄 알고 비운뒤에는 다시 채워짐을 믿을 줄도 알며 주어진대로 푸르름을 받았다가 되줘야 할때 서슴없이 낙엽으로 내줄줄 아는 여유로움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우고 털어내야 할때가 와도 꾸역꾸역 욕심의 찌꺼기를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려 든다.

한해가 저물면 한번쯤 지난 봄·여름·가을 내내 매달리고 안달했던 욕망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기도로 기다리는 나목같은 마음이 돼야 할텐데오히려 더 집착하고 기어코 채우고 말리라는 모진 마음만 사려 먹는다.세모의 겨울밤, 한번쯤 빈 마음이 돼보자.

그토록 좋은일 덕볼거리만 꿈꾸고 쫓고 매달렸지만, 되돌아보면 모질고 험한일들만 질리도록 겪고 당한 한해였다.

그런게 바로 사람 사는 것이란 체념속에서도 차라리 허튼 욕망대신 겨울 나목처럼 비운 마음으로 살았더라면 속절없는 절망이나 없었으리란 후회가 남는다.

비움으로써 비로소 채우는 겨울나무의 순리대로 지난 세월에 속았다는 세모의 거슬린 마음이 삶을 속인 세월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돌아서기를 기도해보자.

하느님에게도 좋고 부처님이라도 좋다.

사랑했던 사람은 더욱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좋다.미워했던 사람에겐 더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될 단 한조각의 이유라도 찾아낼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도 나쁠것 없다.

겨울바다의 추억을 숨겨둔 사람이라면 노루꼬리만한 겨울오후 혼자 감포행버스를 탈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도 해보자.

하얀 눈송이속에 떠오르는 잊혀진 얼굴이 보고싶은 사람이 있다면 세모에 첫눈이라도 내려주기를 기도해도 좋다.

DS라고만 불러야할 떠나보낸 옛 사람이 있다면 발신인 없는 한장의 연하 엽서라도 띄울 마음이 되기를 기도해도 좋다.

세모연휴 며칠만이라도 돈과 명예란 낱말만은 까맣게 잊고 지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도 괜찮다.

새해에도 밝은 해를 볼 수 있고 맑은 바람을 들이쉴 수 있는 건강 하나만 허락해도 감사 하리라는 기도라면 더욱 좋은 기도다.

세모에 좋은 기도가 많을수록 좋은 새해가 온다고 믿는 것 또한 좋은 것이다.

새해엔 나 이외의 것을 사랑해보자.

정치인은 정직한 야망을 사랑할 줄 알고 권력을 쥔자는 겸허함과 의를 사랑할줄 알자.

가진 자는 청빈의 가치를 더 사랑할줄 알고 내 식탁의 은잔보다 나보다 덜가진 이웃을 더 아끼고 사랑해보자.

그리고 누군가 이런 기도들을 해보면 어떨까.

"법지식을 권력자의 권심)에 꿰맞추면서 '곡학아정'의 굴절을 정의라고 우긴것을 뉘우치고… 개혁의 이름으로 때로는 괘씸죄를 집행하고 독선과 편견으로 재벌을 선별적으로 편애했음을 용서하시고… 다수국민의 뜻과는 다른 붕당의 이익을 다수의 힘으로 날치기 하고도 합법을 주장했던 몰염치로써 집단이기주의의 몹쓸 모범을 보인 오만을 회개하며… 하늘과 땅과 물속에서 터질수 있는 모든 험한 사건들만 가려가며 터져도 끝끝내 비울줄 아는 겨울나무의 순리를 거역하다 개각이 되고서야 자리비워주고 쫓겨나는 어리석음을 신년에는 깨닫게 해주시고…신학기에 고치고 학년말에 바꾸는 교육제도에 수백만 학부모·아이들이 파김치가 되게한 높은 지성이 실은 허깨비 같은 겉똑똑이 지성임을 자각케 해주시고… 아침마다 아파트 복도에 알맹이는 그게 그것인 종이 무더기를 '신문'이란 이름으로 쏟아 뿌리며 입으로는 환경운동을 떠드는 위선을 새해엔 고치도록 도와주시며…".

비록 그런 기도들이 불신받는 사람들의 때늦은 기도라 해도 95년 새해가 영광되고 밝은 한해가 되기 위해서는 첫눈과 겨울바다와 화해의 기도나 바치는민초들의 소박한 기도못잖게 그들의 뉘우침의 기도 또한 우리모두에게 소중한 기도가 될 것이다.

모든이들이 비운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가 세모의 거리에 가득차는 겨울밤은참 좋은 밤이 아니겠는가.

새해를 맞으면서 한햇동안 풋바심하듯 써온 중악성을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는 건강과 평화, 그리고 가정에는 사랑의 은총과 축복이 충만하시기를삼가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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