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제인-박재갑 갑을그룹 창업주

입력 1994-12-06 08:00:00

섬유도시 대구-세월의 흐름속에 그 '명망'은 많이 퇴색했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국내 섬유산업의 요람으로 자리를 지키고있다.'섬유의 산지'라는 이름하나를 얻기위해 지난 수 십년동안 지역의 숱한 섬유업체들은 명멸과 부침을 거듭했고 섬유선각자들은 오로지 섬유를 위해 생을불태웠다. 그 속에서 대구의 섬유는 뿌리가 깊어졌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제는 2천년대 '세계 제1의 섬유도시'를 꿈꾸고있다.

아무리 산업구조가 바뀌어도 섬유를 떼어놓고 대구를 이야기할수없는 것은그동안 섬유인들이 닦아놓은 반석이 너무 단단하기 때문일까. 그만큼 대구에는 섬유의 역사가 진하게 묻어있다. 그 역사속에 솟아 꿋꿋이 섬유를 지키고있는 기업중의 하나가 바로 갑을그룹이다.

대구에서 모범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한 갑을의 오늘이 있게한 창업주 박재갑회장은 지금은 고인이 된지 오래지만 풍운아같은 삶속에서도 섬유에 대한 그의 애착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자 박재갑회장은 1923년 4월13일 당시 경북 영일군 포항면에서 어물도매업을하던 박춘환씨의 3남2녀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비교적 유복한 집안이었다.그에게는 먼저 태어난 형이 있었으나 박회장이 9세때 사망, 실질적인 장남이됐다.

자산의 고향은 원래 경북 의성이다. 증조부가 이조말 의성감찰을 지낼정도로시골에서는 세도가 집안이었다. 부친대에 이르러 집안이 기울자 고향사람 볼면목이 없어 가족이 함께 포항으로 이주하게 된다. 부친은 이곳에서 어물 도매업으로 재기,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자산은 이무렵 태어났다. 갑을그룹의다른 한쪽바퀴인 자산의 동생 박재을씨는 박회장보다 10년뒤에 태어났다.부친은 어물도매업을 바탕으로 다른 사업을 결심한듯 울릉도산 나무를 실어다 파는 목재업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두사업 모두 순탄치를 못해 그동안모았던 재산이 바닥나자 부친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처가살이까지 하게된다.재갑씨는 어릴때 아버지로부터"등겨 세섬만 있으면 처가살이는 절대 해선 안된다"는 말을 수도없이 들었다. 소작이나 날품팔이로는 가세를 일으킬수 없다고 판단한 부친은 결국 혈혈단신 만주행을 결심하게된다. 1년뒤 같은 만주행 열차에 13세소년이 타고있었으니 바로 아버지를 찾아나선 재갑씨였다.이렇게 자산은 사업에 실패하고 처가살이 끝에 만주까지 이주하는 부친의 숱한 인생역경을 목격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후 그룹을 세우기까지 재갑씨가 보인 '홀로서기'에 대한 강한 집념은 이미 어린시절에 얻은 교훈이었다.

만주에서도 오지인 통화성 류하현 류수하촌의 한 중국인 집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난 재갑씨는 먼저 목동일부터 거들었다. 명석하고 사교성이 좋아 그곳에서 인심을 얻은 재갑씨는 목동노릇을 하면서도 늘 자립의 꿈을 잊지 않았다.

마침 만주평야 류수하촌에는 쌀과 밀이 무진장인데도 이렇다할 정미소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재갑씨는 당장 중국인 주인에게 돈을 꾸어 발동기 달린 정미소를 세웠다. 17세때였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수십리 떨어진 다른마을에서도 이 정미소를 찾았고 불과 몇년안돼 재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사업이 번창하자 2차대전때는 일본의 군량미까지 도정 주문이 밀려들었다.이무렵 동생 재을씨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다. 자신이 제대로 교육을 못받았기 때문에 동생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정규교육을 시켜야겠다고 결심,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기대에 어긋나지않게 재을씨의 학업성적이 뛰어나자동생공부는 끝까지 책임지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40리 떨어진 학교를 보내기위해 하숙방을 얻어주며 공부를 시켰다.

갑을이 대기업으로 성장한뒤에도 형제간 의견이 틀릴때면 동생은 언제나 형의 의견을 존중한 것도 재갑씨의 동생에 대한 이같은 사랑때문이었다. 언젠가 박재을씨는 "형님은 제게 있어서 천황입니다"라고 술회한적이 있다. 이처럼 재갑 재을 형제애는 바로 갑을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어린 재갑씨에게 시련은 곧 닥쳐왔다. 전쟁이 끝나자 중국인들이 적의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재갑씨는 엄청난 재산을 만주에 남겨둔채 빈손으로 가족과 함께 고국에 돌아오지 않을 수없었다. 전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군 군량미를 도정하던 정미소를 중국인들이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주를 떠난지 10여일만에 무일푼으로 귀국한 재갑씨는 큰누님이 살던경남 마산에 정착하게된다.

재갑씨는 마산 부둣가에서 해방이후 일본에서 귀향하는 동포들의 귀국선 짐꾼 노릇을 하다 우연히 멸치상회와 인연을 맺어 그곳 창고일을 맡기도 했다.그당시 가족들은 엽연초장사를 했고 "공부만 하라"는 아버지의 호령에도 불구하고 동생 재을씨는 자전거 수리공으로 일하는등 모두 어렵게 연명하고 있었다.

재을씨는 자전거 수리로 가계에 보탬을 주지만 이것을 계기로 자전거와 묘한인연을 맺게된다. 사이클에 관심을 갖게 된것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각종 시합에 나가,우승을 여러번 차지하더니 마산상업을 졸업하고도 일반부 사이클에 계속 출전, 마침내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6·25만 없었더라면 재을씨는로마올림픽에 참가했을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재갑씨는 만주에서 정미소를 하며 큰 재산을 모았던 그때의 '꿈'을 잊을수가 없었다. 장사에는 어느정도 이골이 난 재갑씨가 독립의 꿈을 키우던중 6·25가 터졌다. 재갑씨는 국군방위군에 소집돼 최전선인 영천에 배치됐고 재을씨는 통역장교로 들어갔다.

부친은 아들이 모두 징집되자 마산의 집을 팔고 대구 대신동으로 올라와 버렸다. 전세가 호전되자 5개월만에 제대한 재갑씨도 둘째누님의 권고로 대구로 올라오게된다. 지역 대부분의 섬유인들이 그렇듯 재갑씨의 본격적인 사업행로도 이렇게 대구 대신동에서부터 시작된다.

51년 둘째누님 무임씨(현대섬유 이성홍의 모)의 도움을 얻은 재갑씨는 대구서문시장에서 포목상을 열었는데 이것이 섬유와 인연을 맺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무임씨는 당시 서문시장에 한평짜리 점포를 갖고있었는데 이것을둘로 쪼개 동생 재갑씨에게 빌려준 한것이다.

재갑씨가 포목상을 시작한 51년 봄,서문시장-갑을그룹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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