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제인(44)-김추호 아세아산업공사 회장

입력 1994-11-22 08:00:00

광복이후 60년대까지 우리 농업은 형편없었다. 양곡 생산량이 모자라 외국의농산물을 대량으로 원조받거나 사들였지만 그래도 보릿고개가 사라지지는 않았다.광복 당시만 해도 식량사정이 그렇게 나빠질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못했다.국토분단으로 인해 당시 근대공업의 기본요소인 유연탄의 99·5%,철광의 99.9%,발전시설의 87%가 북한에 넘어갔고 지하자원과 기타 공장시설도 대부분북한땅에 있었다.

이때문에 남한은 공업국가로 발전하는데 매우 불리한 여건에 놓이게됐지만농토가 많아 식량만은 충분히 자급자족할수 있을것으로 생각됐다.그러나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심리적 해방감으로 인해 1인당 식량 소비량이 는데다 수백만명에 달하는 북한 피난민,해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등으로 인해 인구도 급증,해방직후부터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해마다 보릿고개니 춘궁기니 하는 현상들이 되풀이되었고 가난의 악순환도계속됐다. 1953년만 해도 쌀 소비량이 연간 2천4백38만여섬이나 됐지만 국내에서 생산 공급할수있는 양은 1천7백28만여섬밖에 안돼 7백20만여섬의 쌀을구호양곡으로 받거나 귀중한 달러를 허비해가며 사들여와야 했다.이때문에 식량 자급을 위한 농업생산성 증대는 50~60년대 우리 정부의 최대과제중 하나였다. 정부는 낫과 호미로 하는 우리 농업의 전근대성을 탈피하기위해 농기계 보급을 서둘렀다. 그러나 농촌의 구매력이 형편없어 극히 소수의 부농이 아니고는 양수기 살분기를 살 엄두조차 못냈다.양곡이 모자란다지만 계절에 따라 양곡 값이 춤을 춰 수확기에는 폭락하고단경기에는 폭등하니 농민들의 생활도 매우 궁핍할수밖에 없었다.1960년의 경우 연간 농가소득은 5만4천원. 게다가 농가마다 막대한 고리채를지고있어 농기계를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수확기가 되기도 전에고리채를 갚기위해 헐값에 입도선매하고 춘궁기에는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농사자금을 마련하기위해 또다시 고리채를 얻어야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있었다.

정부는 농민들의 구매력이 전혀 없는 사정을 감안,정부예산으로 농기계를 구매해 농가에 보급키로 했다. 농기계 생산업체들로서는 든든한 수요처가 생긴셈이어서 새로운 농기계 생산업체가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김추호회장으로서는 이미 양수기 국내 첫 개발로 엄청난 성가를 올리고있는만큼 품질과 상품의 지명도에서 큰 문제가 될것이 없었다.

오히려 정부에서 급한 일이 있을때마다 김회장의 아세아산업공사를 찾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김회장은 든든한 구매처인 정부와 거래를 하면서도 재미를 보기는 커녕 큰 어려움을 겪게 된 일이 많았다.

6·25전쟁때문에 부산으로 내려왔던 정부가 서울로 되돌아간 직후의 일.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서울로 올라가면서 보니 산마다 나무 한그루없이 황폐해져 있었다. 이대통령이 수행원들에게 "왜 저러냐"고 물으니 "전쟁탓도 있지만 취사·난방용으로 쓸 연료가 없어 산의 나무를 베어다 쓰기때문"이라답해왔다.

이에 이대통령은 "서울에서는 화목을 금지시키고 대용연료를 즉시 개발 보급토록 하라"고 산림조합에 지시를 내렸다.

당시 경기도 평택에는 토탄이 많이 나왔다.

이 토탄은 아궁이가 난로처럼 생겨야 밑으로부터 공기가 많이 들어가 잘 탈수있었다.

아궁이는 산림조합의 한 직원이 개발해내 특허를 냈다.

산림조합 이사장은 아궁이를 만들 업체로 김회장의 아세아산업공사를 지목했다.

아세아산업공사가 이미 전쟁전부터 기계업체로 성가를 높인데다 전쟁때문에대부분 산업시설이 이미 잿더미가 된 형편이어서 달리 맡길만한 곳도 없었다.

김회장은 산림조합 이사장과 납품 계약을 맺었다.

1차로 서울 종로경찰서 관내 파출소와 여관,음식점에 보급키로 했다.이 1차 납품물량만 해도 수천대나 되는것이어서 김회장은 자금마련을 위해평생 처음으로 전 재산을 은행 담보로 넣고 대출을 받았다.물건을 다 만든 김회장은 서울 종로경찰서로 싣고갔다. 1954년,제3대 국회의원 선거기간중이었다.

물건값을 달라하니 서장과 산림조합 이사장이 수의를 한뒤 "선거가 끝나야돈 주지. 지금 선거중인데 난로 팔면 표 떨어지니 기다리시오"하고 당시 종로을 선거구에는 무소속의 김두환후보가 여당 후보와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있어 경찰등 각 기관마다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기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않았었다.

5월20일 투표가 끝나보니 김후보가 여당후보를 제치고 당선돼 종로경찰서장이 문책 파면됐다.

난로값을 책임지고 회수해줄 사람이 없어진것이다.

물건이라도 건지자싶어 종로경찰서 관내 파출소를 돌아보니 난로는 이미 넝마주이가 다 주워가고 없었다.서울에 계속 머물며 돈을 받을 날만 기다리는데 대구에서 "며칠후 은행에서 회사를 경매에 부친다"는 연락이 왔다.급히 내려와 은행지점장을 찾아갔다.

"잘 돌아가는 회사만 돈 대줄것이 아니라 나처럼 억울하게 당한 사람에게도돈을 대주는것이 은행이 마땅히 해야할 도리 아니오. 양수기를 만들어 팔면빚을 다 갚을수있으니 3천만원만 더 융통주시오"

그러나 지점장은 "형편이 딱한줄은 알지만 이렇게 안하면 내 목이 날아간다"며 "기한을 조금 연장해주겠다"고 양보해왔다.

경매위기를 넘긴 김회장은 일가 친척의 모든 재산을 털어 다시 공장을 돌렸다

농기계 생산에만 전념해 얼마후 빚도 다갚고 회사를 정상화시킬 수 있었다.50~60년대 수차례의 위기를 딛고 승승장구하던 아세아산업공사는 그러나60년대말에 결국 넘어지게된다.

이 일도 정부에 분무기를 납품하면서 입게된 피해때문이었다.당시 아세아산업공사가 국내에서 처음 개발,공급한 분무기는 기계 품질에 전혀 하자가 없었는데도 농기계를 처음 접하는 농민들의 서툰 작동과 기계 혹사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김회장은 애프터서비스에 책임이 없었지만 달리 이를 보수할 곳도 없어 자신이 모두 떠맡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근 5년간 전국 각지에서 고장난 분무기를 아세아산업공사로 보내는운송비,수리비,수리후 발송비까지 전액 부담하는 바람에 아세아산업공사의자본이 모두 잠식되는 결과를 빚게됐다.

이때문에 김회장은 자신이 피땀흘려 가꿔온 칠성동 공장과 집까지 모두 날리고 길에 나앉아야하는 형편에 이르게됐다.

당시 칠성동 공장의 굴뚝은 대구에서 제일모직 굴뚝 다음으로 크다고 할 정도의 규모였던 만큼 충격도 컸다.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채무자들에게는 빚돈 대신에 농기계를 지급했다.

김회장은 장남 웅길씨를 불러들여 일손을 돕도록 하는 한편 71년 대구노원동에 갓 조성된 3공단에서 재기에 나섰다.

이 3공단의 공장은 맨손으로 시작됐지만 이후 농업용 디젤엔진,동력분무기,관리기등을 잇따라 개발해내면서 제2의 황금시대를 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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