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타인의시간-도도의 새벽 13

입력 1994-11-22 08:00:00

차츰 또랑히 열리는 의식 속으로 짐짐하던 지난 일들이 알감자처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재작년 가을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제주도로 예정에 없던 여행을 가신 적이 있었다. 우리는 무슨 볼일로 부산 고모집에 간 줄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제주도였다."엄마들이, 왜 거기 가 있어?"

그날 늦게야 전화로 소재를 알려준 어머니에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물었다.

엄마들이, 라고 헛말이 나올 만큼 나는 무척 당황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목소리는 시종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바다를 건너오면서 음성의 살과 기름기들은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늬 아버지도 늙으신 모양이다. 마침 어디서 비행기표가 생겼다고 못 살게조르길래 내가 졌다."

"언제 올라올 거야?"

"모레 늦게나 올라가지 싶다. 나 없는 동안 밥 굶지 말고, 학교 잘 다니고. 이제 어미 없이도 살 버릇 해야지. 끊으마."

그리고 덜컥 전화가 끊겼다. 나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뒤끝이 떨떠름했지만 언니와 오빠들에겐 좋게 말해 주었었다. 만일 큰오빠의 말이 사실이라면어머니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통고를 받은 때가 그쯤이 아니었을까 하고 곱새겼다.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런 여행 부분만 제하면 이상한 점이라곤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약속한 제날에 돌아오셨고 표정도 분명 밝았었다. 그리고 또 우리들의 선물도 사오지 않았던가. 그때 선물 받은 그 돌하루방은 얼마 전까지 내 책상 위에놓여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뒤 나는 그것을 창고 속에 처박아 버렸었다.

"난 아까부터 지난 날들을 뒤돌아봤어. 마치 한장 한장 일기장을 넘기듯 쫀쫀히 점검해 봤지만 그럴 만한 꼬투리를 발견할 수 없었어. 그런 걸 보면 우린 참 바본가봐."

여전히 머리를 무릎깍지 낀 속으로 떨군 채 작은오빠가 웅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작은오빠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메부수수해진 머리칼은 달빛이희치희치 묻어 있었고, 오빠의 어깨는 시종 풀잎처럼 떨리고 있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