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타인의 시간 (84)-도도의 새벽①

입력 1994-11-08 08:00:00

밤은 어김없이 찾아와 짙은 빛깔로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집안은 아까부터 물속처럼 고즈넉이 잠겨 있었다.살아 움직이는 것은 수족관 속의 금붕어뿐,모든 것이마치 박제된 미라 같았다.언니는 저녁도 생략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고,안방은잠잠했다.큰오빠는 어젯밤 한 차례의 전화 연락이 있은 뒤 여태 종무소식이었고,작은오빠는 아버지의 죽 그릇을 주방으로 내놓고 들어간 뒤 지금까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오늘은 생략하실 참인지,평소같으면 시작되고도 남을 시간인데도 아버지의 중얼거림은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오늘 하루만이라도 제발 얌전히주무셔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며 나는 우울히 책상 앞에 엎디어 있었다.차츰 팔베개한 팔뚝의 저릿한 신경줄을 타고 깊은 무력감이 차 오르고 몽롱한 의식속으로 눈꺼풀도 무겁게 내려앉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은유 집에 가서 만판 놀다올걸 하는 후회감도 들고 시장에서 돌아오면서 그렇게 먹고 싶던 바나나를 신물이 나도록 먹고나 올걸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낮에 잠깐 가졌던 황홀한 기분이 꼭 아스라한꿈 같기만 했다.

아직도 버림받은 바나나는 주방에 고스란히 방기되어있었다.바나나에 관한 한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내가 그 바나나에 대해 잔설명을늘어 놓으면 언니가 무척 감격할 줄 알았는데 실상은 반대였다.나는 언니가 그런반응을 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너 아주 웃기는 계집애로구나.내가 언제 그래라고 시켰댔니]일순 침대에서 화들짝 몸을 일으킨 언니가 눈에 파란 불꽃을 튀겼다.나는너무뜻밖이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연히 서 있었다.언니가 그렇게 자심히성깔을 돋우는 걸 나는 처음 보았다.

[당장 갖다줘]

다시 침대 위로 꺾이듯 풀썩 쓰러진 언니는 이불을 뒤집어썼다.뒤집어쓴 이불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나는 내 말 속에서 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한것이 무엇이었던가를 꼼꼼히 되짚어 보았지만 그럴 만한 언턱거리를 종시 찾을 수가 없었다.

허탈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