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타인의 시간

입력 1994-10-28 08:00:00

[은행에 무슨 볼일로 가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면 안될까? 은행 볼일이라면한시간 정도 외출증을 끊어도 될 텐데]그러면 다음 시간이 자신의 수업이라 결과 처리를 안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못을 박듯이 대답했다.

[꼭 조퇴를 해야 해요. 선생님께 걱정 끼쳐 드리는 행동은 안할게요][승혜를 못 미더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하도 안타까워서 그러지]담임 선생님은 더는 캐묻지 않고 조퇴 허가증을 가져와 기록하기 시작했다.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선생님은 기록하다 말고 잠시 턱을 괴고 있었다.조퇴 허가증을 받아 나오자 교무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유가 가방을 안줄 듯이 거머쥐고 간지게 말했다.

[난 네 말이 너무 어려워 못 알아먹겠어. 꽃 꺾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좀더 쉽게 설명해 줄수 없겠니?]

[지금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어]

[제비꽃이니?]

이윽고 은유가 뽀로통해져서 따졌다.

[나중에 다 말해 줄게. 그러면 지금의 내 기분을 이해하게 될 거야]은유가 어쩔수 없다는 듯 가방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 은유에게 애써 웃음을지어 보였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긴 부저가 울리고 있었고, 운동장에는 체육 수업을 받을애들이 송사리떼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가방을 멘 나는 햇살이 물든 현관입구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이따 집으로 전화해. 기다릴게]

실외화로 갈아신고 있을때 은유가 소리쳤다. 나는 장미꽃의 향기를 맡으며따스하게 햇살이 깔린 인도블록을 따라 또박또박 걸음을 뗐다. 수런거리던 등뒤의 교사가 차츰 적막감으로 묻혀갔다. 지금쯤 선생님과 아이들이 인사를 주고받고 있을 정겨운 모습도 보이고 유독 내 자리만 생채기처럼 비어 있을 서러운 모습도 보였다. 내가 왜 담임 선생님과 은유의 만류까지 뿌리치고 이렇게 쓸쓸히 교정을 걸어나와야 하는지 착잡하기만 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