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타인의 시간(52)

입력 1994-10-01 00:00:00

나의 진지함을 우스개로 짓뭉게 버린 것 같아 몹시 화가 났지만 진심이 아님을 내가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눈을 뭉쳐 은유의 앙가슴에 갈축없이 죄 디밀어넣는 것으로 용서했다. 알싸한 눈덩이가 맨살에 닿자 은유는 자지러지는소리를 내며 왜자겼다.[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변색......]

은유 부모가 경영하는 약국 앞에 이르렀을 때, 은유가 한사코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레스토랑 앞에서 은유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마지못해 은유의 팔에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은유가 점심 얻어먹은 얘기며 나의 형부될 사람에대해 달떠서 얘기하자 은유 엄마는 드링크제 한 병을 건네주며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승혜는 좋겠구나.그래 언제 결혼하니?]

[봄쯤 할 것 같아요]

내가 소파에 얌전히 앉아 대답했다.

[우리 은유는 언제 커서 이런 좋은 소식을 듣게 해 줄꼬. 은유야, 너 혹시마음에 새겨둔 사람 있으면 엄마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을래?][아이 엄마두, 참]

엄마의 너스레에 금방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은유가 제 엄마의 등을 두드렸다. 나는 은유 엄마의 행복한 표정을 보며 은유 엄마가 작은오빠를 봐도 저런 표정을 지을까, 하고 생각했다.

[넌 애가 그 모양이냐. 손모가지가 없니?]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들어서자 어머니가 안색을 파랗게 일구어 나를나무라셨다. 나는 그제서야 집에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나는 어머니가 세 시간 넘게 안절부절 못하시고 나를 기다렸을 것을 생각하며 우연히 형부될 사람을 만난 일을 눙쳐 말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어머니가 안방에 가 드러누우며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어째 에미 생각을 손톱만치도 안 하나 그래. 전화하는데 한 시간이 걸려 두시간이 걸려. 난 영락없이 무슨 사고가 난 줄 알았다. 아이구, 애물단지들]

뒤따라 들어간 나는 면목이 없어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려 했지만 여전히 꽁한 마음이 남아 있었던지 어머니는 내 손을 어깨로 탁 떨쳤다. 그 마음은 그날 가족들이 다 들어올 때까지 이어졌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