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타인의 시간(48)

입력 1994-09-27 08:00:00

아빠 말이 사실일까?어느 순간, 내가 중얼거렸다. 의식은 이미 말갛게 개어 있었고, 밤은 서럽게도 우리의 가슴을 바람처럼 꿰고 고즈넉이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의 여린 숨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난 벌써 잊어버렸어. 말이 말 같아야지. 변명일거야. 말하자면 남편으로서아내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서 탈피하고 싶은 항변같은 거. 아니라면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거나

언니가 가만히 속삭였다. 언니의 젖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고무풍선처럼 콧속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럼 언니는 그 이유가 뭐라 생각해?

나의 물음에, 괴로운 듯 창쪽으로 돌아누운 언니가 한동안 숨죽이고 있다가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엄마가 당했다고 생각해. 요즘 신문 지상에도 그런 일이 종종 보도되잖아. 어느 날, 밤에, 돌아오다가 끌려가서... 만일 그랬다면 엄마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야. 유서에도 그랬잖아. 여자는 몸에 칼이 들어와도 몸가짐을 흩뜨려서는 안된다고. 불가항력적이었겠지만, 엄마는 결국 그걸 지키지 못한 걸거야. 돈 관계는 아닌 것 같애. 여태 펑크 난 데가 없잖아. 넌?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결코 우리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치욕적인 병같은것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최근 얼마 동안 엄마의 행동에 의문점이 많아. 밥그릇을 따로 쓴 것도 그렇구, 갑자기 성당에 나간 것도 그렇구, 당분간통원 치료하면 된다고 해놓고 계속 다닌 것도 그렇구, 대중 목욕탕에 안 나간 것도 그렇구, 하여튼...... 비록 작은오빠의 추리긴 하지만듣고 보니 그렇기두 하겠다. 엄마가 좀 크레믈린이니. 그렇다면 그 병이란뭘까?

그걸 알면 우리가 왜 잠도 못 자고 이렇게 괴로워하겠어..... 하지만 난 슬퍼하지 않아. 이것도 우리 운명인걸, 뭐

너는 속도 좋구나

그렇지가 않아. 다만 돌로의 법칙을 믿고 있을 뿐이야. 진화한 생물은 결코되돌아가는 법이 없듯이 진행된 시간도 마찬가지야

언니가 다시 나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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