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타인의 시간

입력 1994-09-22 08:00:00

젖어드는 저녁-20그 사진은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우리가 찍어 드린 것이었다. 싫으시다며사진관에 가지 않으려는 걸 억질로 떠다밀다시피 해서 찍은 사진이었다. 나중에 그것을 알고 아버지가 농으로 시샘했던, 사연이 있는 사진이기도 했다.수줍은 듯 잔잔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사진 속의 어머니는 처녀 시절에미인이었음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이 천천히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당신, 그 사람 생각 나오? 우리가 신혼여행 갔을 때 해변가에서 우리 사진찍어 준 그 사진사 말이오. 눈이 양놈처럼 부리부리하고 턱주가리에 붉은점이 박혀 있던 그 사진사 말이오. 우리가 다정스레 붙어서지 않는다고 고함을 지르다가 결국 목까지 쉬었지 않았소. 그때도 당신은 참 부끄럼이 많았소.지금도 그렇지만 말이오, 흐흐. 내가 처음 도서관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달리 느꼈던 것도 그 부끄러움 때문이었소. 당신이 무슨 일로 도서관에서 넘어지지 않았소.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엉겁결에 내 무르팍에 덜컥 안기지 않았소. 그때 난 당신의 귀를 보았소. 얼마나 빨갛던지 꼭 가을이면 시골의 우리집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리던 홍시 같았소. 나는 어릴 때부터 홍시를 무척좋아했었소. 한번씩 시골에 내려가면 홍시를 한바가지씩 먹곤했었소. 그래서집에서는 늘 홍시를 저장해 뒀댔소. 그건 당신도 잘 알잖소. 이제 당신도 많이 늙었구려. 그 곱던 얼굴이, 어느새 잔주름이 잡히고 머리칼도 희끗희끗한걸 보니. 나도 그렇소? 나는 당신이 영원히 안 늙을 줄 알았소. 우리 승혜,결혼만 시키면 시골로 내려가 삽시다. 나는 벌써 우리가 살 집을 설계해뒀소. 당신도 내 설계 도면을 보면 당장 거기 가서 살고 싶을 거요. 당신, 빨간 구기자 열매 봤소?......]

아, 저 의식. 사람의 가슴을 서서히 허물어뜨리는 저 안개 같은 넋두리.언제인가부터 아버지는 저렇게 끝없이 과거 속으로만 줄달음치고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제발 저 의식만은 멈추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리듯두 손을 움켜 쥐었다. 소리없이 다가온 작은오빠가 내 등을 가만히 어루만져주었다. 작은 오빠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 한방울이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휘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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