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타인의 시간

입력 1994-09-08 08:00:00

젖어드는 저녁-10내가 왜 시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갖게 되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설명할길이 없다. 국민학교 때부터 특별히 문예에 관심을 가졌거나 그렇다고 소질이 있다는 칭찬을 들었거나 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여름인가 가족들과함께 망상 해수욕장으로 바캉스를 갔다가 찰싹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후로 내 생각을 한 번도 바꾸어 본 적이 없었다.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은유의 말처럼 정녕 꿈이란 영감으로 오는가.은유도 그랬다고 했다. 은유는 장차 카니 정 같은 앵커우먼이 되는 꿈을 갖고 있는데, 어느 날 양변기 위에서 잡지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가졌다고 했다. 처음 은유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얼마나 감격했던가. 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도 그런 동류의식 때문인지도 몰랐다.은유는 지금도 그 꿈을 알천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실제로 은유는 그방면에 놀라울 만큼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테면 텔레비전의 화상합성을 위한 특수 기법으로 크로마키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있는 날은 블루 계통의 의상은 피하는 게 좋고, 텔레톤 같은 장시간의 라이브 때는립글로스 대신 립스틱을 브러시로 바르고 스펀지에 소량의 가루분을 묻혀 입술에 덧발라 주면 번쩍거리지도 않고 우아하게 보일 뿐더러 오래 간다는 것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은유는 세계 유명 여성 앵커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있었다. 바바라 윌터스, 다이언 소여, 안느 생클레르, 마리아 슈라이버, 제인 폴리등. 그들의 장단점은 물론 헤어스타일, 옷 매무새, 좋아하는 색상,목소리의 특징, 심지어 사생활까지 훤히 꿰고 있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은유를 보면 놀라움을 넘어 두려워 보일 정도였다. 내가 자극을 받았음은 물론이었다.

나는 언젠가 은유가 유명한 앵커우먼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현재 방송반원이기도 한 은유의 샘물같은 목소리가 그런 신뢰감을 주기도 한지만,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키우는 아이를 여태 나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은유의 또랑한 목소리가 첫 전파를 타는 날, 나는 꼭 축하 메시지를띄울 것이다. 너의 콜사인을 듣는 순간, 버덩에 선 무지개를 보는 것 같았노라고.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