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타인의 시간

입력 1994-08-25 08:00:00

잉크의 시간-22붉덩물 같은 은유의 토악질은 분개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은유의 눈에는 그렁한 눈물이 묻어 있었고,보풀보풀 거스러미가 돋은 입술은 거친 숨결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멍한 시선으로 바람을 안고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거들떠보기도 했다. 우리의 어정뜬 자세가 꼭 토닥거린 뒤끝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한번은 혼자 집을 보다가 엄마 아빠가 보는 비디오를 우연히 훔쳐본 적 있었어. 그걸 보다가 기분이 이상해져서 아주 혼났어. 누구나 이렇게 타락할수 있겠구나,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어.]

나는 안쓰러워 은유의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은유한테서전염되었는지 자꾸 속이 매슥매슥해지는 걸 간신히 참으며 내가 말했다.[그러면서 넌 왜 우리 작은오빠에게 관심을 안가지는 거니?][자신이 없었어. 너네 오빠는 너무 완벽하잖니. 그리고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그렇지가 않아. 난 우리 작은오빠가 친오빠가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생각을 한 적도 많아. 잘 몰라서 그렇지, 작은오빠 가슴이 얼마나 따뜻하고넓다구. 그러니 일단 작은오빠 가슴 안으로 들어와봐. 그러면 생각이 달라질거야. 작은 오빠도 널 좋아할거야. 난 작은 오빠를 잘 알거든. 너와 작은오빠, 그리고 나와 작은오빠와 같은 사람, 그렇게 넷이서 같이 살면 좀 좋으니.난 진작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는 힘주어 말했다. 은유가 가방을 추스르며 하르르 한숨을 내쉬었다.[그건 그렇고, 우리 모리셔스까지 걸어가 보자. 이대로 헤어져 집에 들어가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애. 응? 승혜야.]

[그래도 난 들어가야 돼.]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은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당겼다. 공중전화부스 쪽으로 나를 끌고가는 은유의 손아귀 힘은 전에 없이 암팡지고 강단져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은유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까닭모를 두려움 같은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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