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의 시간-20[엄마는 너무도 천연스레 이렇게 쓰셨어.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공부 열심히 하고 밥 잘 먹고 청소 잘 하라고 말이야. 여자는 몸에 칼이 들어와도 몸가짐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되고 목숨처럼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야. 엄마는 구차하고 나약하고 눈물 많은 여자를 제일 싫어한다고말이야. 꿈이 없는 사람, 꿈을 포기하는 사람,꿈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을제일 경멸한다고 말이야. 승혜는 결코 좌절하지 않으리라 굳게 믿는다고말이야. 승혜가 굳굳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향상 지켜보고 있겠다고 말이야]나는 어느 새 감정이 북받쳐 울먹이고 있었다. 그래도 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땐, 난 엄마를 사랑했지만 지금은 존경해. 그런 절박한상황속에서도 엄마로서의 품위와 위치를 잃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니,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니]
나는 그때 보았다. 은유의 눈에서 선연히 금을 긋고 있는 투명한 눈물을. 은유가 내게 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라일락을 보는 척 시치미를 뗐구나,은유가 내게 자신의 나약한 감정을 열어보이지 않으려고 지며리 침묵을 지키고 있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은유의 손을 잡아 당겼다.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마치 다툰 사이처럼, 영원히 서로 말을 하지 않을 것같은 버성김으로 걸었다. 은유는 담장 쪽 장방형의 주사빛 보도 위를 걸었고나는 한길 쪽 보도 위를 걸었다. 꽃집을 지나고 세차장을 지나고 슈퍼를 지나고 편도 3차선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시 오피스텔 신축 부지를 지나고 내가 자주 가는 대중 목욕탕을 지나갈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늦은 오후의 봄볕은 쌀쌀했고, 이따끔 스치는 짓렴은 살바람이 음흉하게 우리의 치맛자락을 들추어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바람을 등지고 염전히치맛자락을 거머쥐고 잠시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 은유는 한마디의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헤어져야 하는 고샅 입구에 이르렀을 때였다. 일순 걸음을 멈춘 은유가 찬찬히 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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