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타인의 시간17

입력 1994-08-19 08:00:00

나는 이 만년필의 위력을 믿고 싶었다.작은 오빠가 그랬듯이 내처 어머니 쪽으로만 침잠해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일시에 되돌려놓고도 남을 강력한 아포리즘을, 이 만년필로 엮고 싶었다. 만일 이 만년필이 그런 기적을 만들어낸다면 나는 기꺼이 신으로 모실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아직 그 언어들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온종일 그 아포리즘-가장 짧은문장의, 가장 긴 메시지-을 찾아 나의 언어 세계에 깊이 몰입해 있었다. 나의 눈은 시종 초점을 잃고 있었고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심지어 은유마저 잊고 있었었다. 참다못한 은유가 뾰로통해져서 소리쳤다. 그때까지 나는 은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너, 나를 위해 시간 좀 내 줄 수 없겠니?]

[미안해. 난 지금 몹시 바빠]

[또 케니 G 니?]

[자꾸 말시키지 마. 내 머릿속을 네게 보여줄 수 없는 게 퍽 유감이야. 내머릿속은 온통 납덩이 같은 센텐스들로 들끓고 있어. 곧 폭발할지도 몰라] 은유는 더이상의 대꾸 대신 내 손을 잡았다. 은유의 손은 차갑고 매끈했다. 그손이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내가 도와줄 길은 없니?

-아빠, 이제 그만 돌아보세요. 거기, 사랑하는 아빠의 딸, 승혜가 안타깝게서 있어요.

나는 어렵게 만든 머릿속 문장을 다시 지우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어느새봉창으로 비껴든 저녁 햇살이 시나브로 쓰러지고 있었다. 엷은 그늘이 드리워진 망막 위로 어머니의 생전의 모습이 물속의 그림자처럼 일렁거리며 잔잔히 떠올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두달이 넘었건만 아직도 그 사실을인정할 수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그 충격이 너무 크고 뜻밖이어서 그럴까.어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그 {검은 방}에서, 마치 장난처럼.-얘들아, 찻길 건널 때 항상 차 조심하고 밤 늦게 돌아다니면 못쓴다.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실감이 안 나겠지만 죽음리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항상우리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다닌단다. 이 엄마가 죽는 것, 한번 볼래?꼭 그런 기분으로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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