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타인의 시간

입력 1994-08-11 08:00:00

잉크의 시간-10우리는 거기서 세상이 좀더 밝은 빛으로 채색될 때까지 풍요로운 아침을 즐기곤 했다. 아버지는 주로 맨손체조를 하시고 운동을 좋아하는 큰오빠는 주로복싱 연습을 하고 작은 오빠는 외따로 떨어져 자주 명상에 잠기고 잠보인언니는 거기서도 종종 졸고 나는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꽃들의 아름다움에 취하고는 했다.

한번은 언니가 쪼그려 앉아 꼬박꼬박 졸다가 밭두둑 아래로 곤두박질친 적이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웃는데 정신이 팔려 아무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제 힘으로 엉금엉금 기어올라온 언니는 화가 나서 그 길로곧장 집으로 들어가 버린 건 물론이었고, 그후 얼마 동안 토라져 아무에게도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의 추억이 언니의 턱 밑에 좁쌀만한 흉으로남아 있다.

요즘 나는 그때를 배경으로 자주 꿈을 꾼다. 이제는 길이 나고 집들이 들어서서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지만 용케도 나의 꿈속에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나보다. 비록 비 오는날이면 운동화에 시루떡 같은 흙밥이 달라붙고 밤이면 인적이 드물고 가게가멀어 불편하기 짝이 없어도 여유로워 좋았던 날들을. 우리가 가꾼 상추로 쌈싸먹고 엄마와 함께 깻잎을 따다가 쪄 먹던 순간들을. 그때는 슬픔이란 걸몰랐었다. 슬픔이란 양로원이나 고아원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이제야 생각이 난다. 나를 무척 따르던 고양이 키티. 어느 날인가 밭두둑에서 동글납작하고 흑갈색인 노인장대의 꽃씨를 받다가 우연히 발견한 키티의처참한 주검. 그때의 충격과 절망은 오래도록 나의 가슴에 멍울처럼 찍혀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집의 앞날을 예감하는 한 증표가 아니었던지. 베르그송은 {시간과 자유 의지}에서 늙음이란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예감으로 다가올 때가 훨씬 절실하고 심각하다고 말했지만 슬픔이야말로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예감으로 다가올 때가 훨씬 절실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에 무심했을까. 내가 밥도 먹지 않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바보 같은 언니는 뭐라고 종알거렸더라? 그렇게 서러우면 당장 시장에나가 새로 한 마리 사다 키워, 별꼴이야. 그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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