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타인의 시간

입력 1994-08-08 08:00:00

잉크의 시간-7만일 그 사실을 작은 오빠가 알았다면 숫제 언니를 경멸했을 것이다. 아니,그 일을 두고 혼자 고민하다가 그예 세상이 잠든 야음을 틈타 그 페르골라위로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작은 오빠는 그런 위인이었다.내가 작은 오빠를좋아하는 이유는 많지만, 허투루라도 남에게 누가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그런 결 고운 마음씨가 특히 나를 사로잡았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아무도 나의 참담한 기분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오직 작은 오빠만이 그걸 알아 주었었다. 수업을 위해 무심코 국어 교과서를 펼쳤을 때, 나의 눈시울을 시나브로 젖게 했던 오빠의 다감한 메시지. 그걸 언제 넣어 두었는지 나로서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기에 흥분은 더없이 벅찼다.

-우리의 슬픔이, 오늘에야 오히려, 극에 달한 느낌이지만, 그 슬픔의 깊은곳에, 희망의 젤리가 숨어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 메시지를 가만히 열어 보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책 갈피 속으로 주르르눈물을 흩뿌릴 뻔했다.얼마나 멋진가, 오빠의 불꽃 같은 아포리즘. 나는 한시간 내내 가슴이 달떠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었다.

그리고 또 있다. 나의 친구 은유.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마음은 또얼마나 고운 은유인가.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되어 알게된은유지만, 그 후 우리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 말고는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은유는 작은 오빠처럼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진지하게 들어준다. 은유의 가슴을 헤적이면 새하얀 속살 밑으로 투명하고싱싱한 샘물이 퐁퐁 솟구쳐 끊임없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은유가 작은 오빠를 진실로 사랑해 주길 바란다. 그런데 은유는안타깝게도 작은 오빠에 대해 별로인 것 같다. 내가 오빠의 좋은 점을 얘기해줘도 은유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 밖에서 듣는다. 도무지 오빠의 가슴 안으로 들어오려고 마음을 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은유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걸까. 아니면 가슴에 사랑이 너무 넘쳐 미처 오빠에 대한 사랑이 스며들 사춤이 없어서일까. 그러나 언젠가는 은유가 작은 오빠를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나는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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