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선인장이야기

입력 1994-06-20 08:00:00

운명(운명) 열넷몸을 반쯤 일으켜 물부터 한잔 마시더니 혜수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혜수의 손이 파들거리고 있었다. 실핏줄이 새파랗게 드러난 아주 나약한손이었다. 혜수는 벽만 오랫동안 쳐다보며 말을 잊고 있더니 결심을 했다는듯 아주 단호하게 대뜸 한마디 하였다.

[언니, 여러가지로 미안해. 나 수술 받을래.]

[아니, 왜?]

난 그러는 것이 사리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이라고 내심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적어도 혜수는 그렇게 할 아이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을까? 혜수의 말에아주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차분하게 되물었다.[난 무엇보다 위선이 싫어. 생명? 정말 소중하지.하지만 아직 채 느껴지지도않는 생명을 내가 정말 존중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아직은이 아이 역시 내겐 관념에 지나지 않아. 나는 물론 단지 입덧만을 경험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야. 하지만 한 존재를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있지는 않아. 아이를 낳는다는 건 아주 특별한 문제인 것도 같아. 나는 이 아이를 통해 세상의 모랄과 이 자그마한 생명에 대한 책임과 선택까지를 강요당하고 있는 거야. 이런 문제 앞에서 나는 생명은 정말 소중한 것이고 자연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도덕적 결백만을 내세울 수가 없어. 기쁨으로 아이를 받아 들이고 있지 않거든. 이상하지. 이 아이가 없었을 때는 과격한 여성해방론자들이 낙태 옹호론을 펼때 전혀 받아 들일 수가 없었는데내 속에서 진짜로 한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는 오히려 아주마음이 차가와지는 거야. 난 그애의 무엇이지? 모성다운 모성이 싹트는 것은언제부터일까? 어머니는 우리에게 그런 위대한 모성을 발휘하느라고 이제껏 혼자 사시며 우리를 돌보셨을까? 난 여성보다 남성이 더욱 낙태를 받아들일 수 없어 하는 걸 종종 보아왔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정말순수한 인간애라면 그들은 왜 전쟁을 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저버리고 배를채우기 위해 육식을 할까?]

혜수는 말하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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