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권점순할머니가 맞은 39회 현충일

입력 1994-06-06 08:00:00

다시 유월. 44년전 6.25전쟁에서 두아들을 잃고 다시 마지막 남은 하나마저군훈련중 먼저보낸 권점순할머니(84.안동시 태화동)에게도 유월이 돌아왔다.시집온뒤로 35년을 몸져누운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세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권할머니의 며느리 김영자씨(52)가 6일 제39회 현충일에 전몰군경유족회로부터 {효부상}을 받았다.며느리의 수상소식에 "저처럼 착한 며느리 세상에 둘도 없다"며 권할머니는아이처럼 좋아하다가 "전사한 세자식중 하나라도 얼굴 좀 보게 해 달라"고두팔을 흔들며 울음을 터뜨린다.

전쟁에서 두아들을 잃은 권할머니는 35년전인 59년 마지막 남은 아들을 고교2년생이던 지금의 며느리와 결혼시켰었다.

새며느리는 날품파는 신랑과 셋방에서 몸져누운 시어머니를 돕기위해 시집온지 사흘뒤부터 이웃집 빨래와 청소를 해가며 살림을 꾸려나갔다.그러던중 72년(그해도 6월이었다)며느리 김씨는 육군모부대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던 남편이 순직했다는 통보를 받는다.

아들 3형제를 둔 김씨는 실신, 병원에 후송됐다 돌아왔다. "울며 불며 발버둥 쳐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병으로 누운 시어머니와 어린 3형제는 밥을 굶을 판이었다.

방비워달라는 집주인의 닦달과 배고파하는 자식들을 보고 함께 죽는수밖에없다고 이불을 덮어쓰고 하루를 버티었다. 눈떠보니 시어머니는 똥오줌으로뒤범벅돼 누워있어 {내가 죽으면 더 큰죄가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시어머니와 자식들을 서로 껴안고 눈물이 마르도록 울고난뒤 {몸이 닳도록 이들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다.

김씨의 딱한 사정을 본 이웃들이 힘을 모아 이들 가족에게 셋방을 마련해 주었다. 용기를 얻은 김씨는 {대포장사}와 화장품외판원을 했다. 며느리를 시집보내라는 이웃의 말을 자주 들어온 권할머니는 며느리의 귀가시간이 늦어지면{도망갔다} {시집갔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올때까지 걱정을 했다고 털어놓는다.

며느리가 보훈청으로부터 대부받아 전세를 얻어 아들 3형제를 열심히 기르는것을 보고서야 안심하게 됐다는 권할머니. 이제 그 손자들은 모두 연세대,계명대, 안동대를 졸업한후 각기 유공, 동서증권, 럭키금성에 취업해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의 보람이 되고 있다. "저 아들들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라며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며느리에 대해 권할머니는 "우리 며느리 상받을만 하지"하고 껴안고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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