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서 김교신 기념강연

입력 1994-06-02 08:00:00

일제시대에 성서연구신앙지인 {성서조선} 지를 간행하며 청년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김교신선생(1901-1945)을 되새겨보는 {김교신기념강연회}가 3일오후7시 대구YMCA3층 교남실에서 열린다.이날 유희세 전고려대교수가 {김교신이후 무교회의 방향}, 성서연구 주필인 노평구씨가 {민족의 이상}이란 제목으로 각각 발표한다.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교신은 20세때인 1920년 일본동경에서 노방설교를 듣고 유교를 떠나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으며 같은해 일본 무교회주의기독교의 창시자였던 우치무라 문하에 들어가 7년간 성서를 배웠다.

김교신이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섬기게 된 까닭에 대해 "나는 우치무라선생으로부터 무교회신앙을 배우기에 앞서 참으로 나라 사랑하는 길을 배운것이다"고 피력한바 있다고 한다.

영생여고 양정고보 경기중학등에서 교편을 잡은 바있는 김교신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의 인격의 특징을 강한 정의감과 깊은 신앙심, 성실성과실천력, 강건한 체력, 일관된 민족애와 사랑의 정신으로 요약한다.김교신은 1945년4월 해방을 불과 몇달 앞두고 숨지기까지 십수년간 {성서조선}주필로서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써왔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사건}으로 1943년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1년간 옥고를치르기도 했다.일본경찰이 김교신에게 조선사람들이 일본천황에 대해 신민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황국신민서사}에 대한 견해를 묻자 김교신은 "황국신민서사는 망국신민서사가 될것이다"고 대답했다는것.

일제말까지 끝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던 김교신은 해방을 몇달앞둔 1945년4월에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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