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호위국 농장지배인을 갈아치우고 수령의 말대로 {무조건성}을 지켜 {보라콩}을 대량 심은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결과는 역시 김일성이 주장해 10년전에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켰던 {기름골}재배 전면도입과 마찬가지로 실패작으로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기름골은 우리나라 북부지방을 비롯, 지중해 남아메리카지역에 자생하고 있는 방동사니과의 풀로서 타식물에 비해 기름성분이 높음. 기름함유량이 단위당 22-28%로 주로 땅속 뿌리부분에 혹처럼 생긴 {기름골알}에서 기름을 채취함. 식용, 화장품, 비누, 칠원료로 사용하며 찌꺼기는 가축 사료로 사용함.(편집자)
북한사회에선 너무나 잘 알려진 이 {기름골}재배소동은 1979년 가을, {기름골}재배의 전국적인 전면도입을 고려하고 있는 실무자 일꾼들에게 김일성이도중에 뛰어들어 이들을 전부 {보수주의}, {기술신비주의}라고 몰아붙이고 반대로 이름없던 평연구사를 영웅화시켜 물의를 빚었던 사건이다.이때 김일성은 평연구사이며 비당원이었던 {기름골}육종연구사 백설희에게자신의 명의와 보증으로 입당시키고 박사칭호와 노력영웅 칭호까지 직접 수여했었다. 또 김일성 이름까지 새긴 값진 물건을 선물로 주고 연구소 소장으로임명했으며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까지 추천하고 대중들에게는 수령충성분자로서의 {숨은영웅}으로 치켜올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백설희에 대한 {숨은영웅}으로서의 영화를 만들고, 소설을 짓게하는등 극찬에 극찬을 거듭하는 한편 {기름골}재배의 전국일시도입을강행시켜 사회적 및 생산적 측면에서 상당한 파문을 불러일으켰었다.당시 농업생산실천면에서 큰 혼란이 일어났던 이 사건. 안하무인격인 김일성의 책상머리계산에 의하면 이 {기름골}을 전국적으로 일시도입하게되면 인민들의 기름문제, 당문제가 단시일내에 해결될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껏밭곡식의 왕이라던 강냉이보다 더 경제적이라고 하면서 강냉이대신 기름골을심을 수 있는한 심으라고 {주체농법}화 하였다.
{주체농법}화. 이것은 단순히 생산방법적 문제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라 수령이 창시했다는 누구도 어길수 없는 정치적 성격을 띠고있는 농업정책이다. 그러나 무조건 몇해동안 전국도입이 실시된후 결과는 {기름골}재배의 불합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인민들이 기름이나 당을 먹는것은 고사하고 이미 먹던강냉이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맞게됐다.
다시말해 오히려 알곡 총생산량의 감퇴로 인한 식량난이라는 국가적 재난을가져왔다. 이때의 식량부족사정이 너무 심각해 김일성은 할수없이 {기름골}재배를 대폭 줄이고 다시 {강냉이}면적을 최대로 넓히라는 지시를 급히 하지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기름골}재배에 대한 책임은 마치 연구사에게 있는듯 {소문난 잔치먹을것 없다}는등 얼버무리고 말았으며 {숨은영웅따라 배우기운동}역시 침묵으로 흘려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김일성이 주도한 {기름골}재배소동은 농업생산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을뿐 아니라 정치운동에 대한 대중으로부터의 불신만 굳혀 나갔을 뿐이다. 아마 삼지연 호위국 농장지배인도 이런 쓰라린 지난 체험을 되풀이 하지않고 또엄연한 농업기술적 체계로부터 {보라콩}의 대량도입을 가능성을 보아가면서확대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런 실무 일꾼의 말을 귀뺨치겠다는 것으로 농사문제를 최고 사령관 명령으로 한 결과는 너무나 뻔했다. {보라콩}을 대량 심기 시작하여 몇년이 지났지만, 전 인민적 혜택은 둘째고 어린이들의 간식용으로도 힘들게 되어 있다. 대표적 생산지인 양강도에서는 절대식량생산도 못하여 타도에서 식량을 계속 지원받아야 하는 처지로서 주민식량배급이 몇달씩 중단되는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다.
이렇게 쓴 체험을 직접 당하고 있는 생산자들은 이제 수령앞에서는 {무조건하겠습니다} 대답을 하고는 실제로는 {보이콧}운동을 벌이듯 {보라콩}을 진정 적지가 아니고선 대량 심지 않고 있다.
그럼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고 한 {기름골}전국재배의 실패 역시 기름골연구사와 실무 일꾼들의 잘못인가.
기름골연구사는 처녀로서 50고개를 바라보도록 시집도 가지않고 오직 과학농업연구에만 전념한 애국자이며, 그가 육종한 {기름골}은 과학계가 인정하는성공한 연구작물이었다. 이 때문에 전국 전면생산도입 실패에도 그 책임을 감히 연구사에게 뒤집어씌울 수 없었던 것이다.
{기름골}작물은 그 자체는 수확가능성이 높지만 이 작물이 요구하는 재배조건과 추수하기는 매우 까다로웠다. {기름골}은 잔돌까지 없는 모래땅에 심어야 적당하나 그러자니 토양분 부족현상이 생겨 수확량이 떨어지고 열매가 밤알보다도 작은데다 그나마 땅속에 달림으로 추수하기 힘들게 되어있다.또 추수후에도 열매속에 당분, 기름, 수분함량이 높아 쉽게 변질해 보관하기힘들고 이 성분들을 분리해 식용화하기에도 손이 많이 가는등 현실에 적응시키기 힘든 작물이었다.
이러한 애로점 때문에 실무일꾼들은 {기름골}의 전국적인 도입을 고려했던것이다. 김일성은 권력으로 이를 억눌러버리고, 시집도 가지 않고 수십년간고생해 성공한 과학성과와 연구사를 {수령충성님}이라는 틀에 씌워 전 인민이수령만을 위하고 따르라는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 것이다.
이와같이 {보라콩}이나 {기름골} 재배문제로 인해 발생된 국가손실과 혼란사태는 호위국 농장지배인이나 기름골연구사 또는 해당실무 일꾼들의 잘못으로야기된 결과가 아니다. 남의 의견을 귀담아 듣지않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독재적인 관료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북사회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듯 아프다. 완전 관료체제에 휩싸여 김일성 중앙집권제하에 수많은 아첨꾼들로 관료주의 공장이 되고 있는 이북사회에서 불쌍한 것은 헐벗은 인민들일 뿐이다. 북한사회에서의 민주주의적 기풍을창조해내고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진정한 사회로 변화되는 시간은 언제그것이 가능하며 어느 동안의 기간이 소요케 될것인지 세월은 무심히 흘러만가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