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국무총리 국회인준 약사

입력 1994-04-25 00:00:00

이영덕총리 내정자에 대한 야당의 국회인준 반대는 앞으로 출범할 이총리내각은 물론 김영삼대통령의 정국 운용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역대총리들의 인준역사를 보더라도 한쪽 세력의 반대로 들어선 내각은 사사건건 야당의 반대를 감수해야 했고 결국 단명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역대21번의 총리인준역사에서 인준이 거부되는 파란을 겪은 예는 모두 여섯차례다.첫 총리내정자였던 조선민주당출신 이윤영씨가 다수당이던 한민당의 반발로이범석씨에게 자리를 내준것이 첫번째 파란이다. 이승만대통령은 그후 50년과 52년말에 다시 동의안을 제출했으나 부결돼 이씨는 결국 전쟁와중에 2주일간의 서리생활로 만족해야 했다. 그밖에 50년 백낙준씨, 52년 이갑성씨, 60년민의원 시절 김도연씨 등이 부결의 쓴맛을 본 주인공들이다.총리에 대한 국회인준이 결국 정치적인 부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자62년 5.16후 개헌을 통해 국회의 총리인준권을 삭제하게 된다. 역대최장수재임의 정일권총리의 기록도 국회인준 절차가 없어진 상태에서 나올수 있었다.총리인준 절차가 부활된 유신헌법이 통과된 이후 총리인준이 거부된 예는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여당의 절대다수 확보때문이었다. 야당은 대신 인준반대를 정권에 반대하는 의사표시의 도구로 사용해 왔다.

6공시절이던 91년 총리에 지명된 노재봉씨와 정원식씨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노전총리에 대해서는 "광주사태는 김대중씨의 외곽을 때리는 수법으로발생했다"는 발언때문에 야당의 반발을 샀다. 또 정전총리는 {전교조}를 탄압한 인물로 지목돼 반대표를 받았고 이들은 결국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야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인물도 없지 않다. 6공말 현승종총리가 대표적인인물로 중립내각을 표방해 2백77명중 2백66명의 찬성이라는 보기드문 기록을세우기도 했다. 이회창전총리도 무난한 점수를 받은 인물이다. 2백60명 가운데 2백20명의 찬성표를 받았다.

이총리내정자에 대한 거부반응은 자신의 문제에 있다기보다는 전임자때문에발생한 것이다. 야당에서도 지지를 보낸 이회창전총리를 경질했다는 이유가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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