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재임 1백28일만에 {소신총리} 이회창은 결국 물러났다. 이전총리가 세인의 관심속에 공직을 떠난것은 이번이 세번째. 오랜 판사생활끝에 지난 86년대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한것이 첫번째였고 89년 동해재선거등에서 부정, 타락선거를 막지못했다며 중앙선관위원장 자리를 떠난것이 그 두번째였다.성격은 다소 다르다. 첫번째는 5공 권위주의하에서 대쪽판사를 하다 봉착할수밖에 없었던 {해임}이었고 두번째는 재임기간중 공명선거에 대한 치열한족적을 남겼음에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데 대해 {책임}지고 나간 신선한 충격의 {자진사퇴}였다. 이번은 아직 자진사퇴인지 문책경질인지 분명찮다.아전인수각해석만 따를뿐이다.김영삼대통령이 이총리를 발탁했을때 그 인사가 임기제인 감사원장에서 그를끌어내 적당한때 잘라버리기위한 것 아니냐는 냉소적인 관측이 정가에 나돌았었다. "청와대 안기부등 어느 기관이든 감사하겠다"며 감사원의 독립을 주창하고 나선 당시 이감사원장이 아무래도 청와대를 버겁게 했을것이란 주석이따랐다. 결과적으로 이대로 된것 아니냐고 지금은 운위되고 있다.이때문에 지난해 12월16일 취임당시 이전총리에게 "총리재임중 김영삼대통령과 뜻이 맞지않으면 어떻게 할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당연히 따랐고 이전총리는 "그런 가정은 그때가서 생각해보자"고 말했었다. {그때}는 결국 취임1백28일만인 22일이었고 가장 큰 사임이유는 전날 총리주재 간부회의에서 통일안보조정회의의 회의결과를 사전에 총리에게 승인받도록하는등의 지시 때문.그러나 이는 직접원인일뿐 사실 {원즉총리}의 재임 1백28일은 기존 얼굴마담격총리라는 관행을 단호히 거부하고 나선데 따른 여러가지 사안이 겹친것이며그렇게 모인 감정들이 쌓임으로 이어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취임 5일뒤 "내각에 실세장관이니 하는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이나와선 안되니우리 모두 실세가 되어 일하자"면서 내각장악권을 키워가던 이전총리는 신년들어서부터 터진 낙동강수질오염사태로 첫 대국민사과에 임했다. 이어 3월부터 주요정책시행을 놓고 청와대등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이전총리는 3월초 내무부는 물론 청와대비서실과의 사전협의없이 관변단체에대한 지원중단을 지시했고 여권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했다. 총리측근들은 이때부터 "제대로 일을 하려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며 정책수행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뒤 이총리는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과 관련해 김량배농림수산부장관이 해임당할때청와대가 "대통령과 국민을 속였다"고 발표하자 엄청나게 괴로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UR문제로 이전총리의 두번째 대국민사과를 {강요}당했다. 안기부장을 비롯한 일부 청와대수석이 자기의 통제권밖에 있다고도 느낀것 같았다.실제로 안기부장에게 개인보고를 몇차례 요구했으나 뜻대로 되지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상무대, 조계종비리의 철저수사, 사전선거운동 엄단등의 소신에 찬 나름의시책들도 청와대또는 비서실등과 의견충돌을 빚었다. 이같은 과부하가 결국21일의 강도높은 {공개지시}로 {폭발}됐다. 통일안보조정회의는 대북한 특사교환철회라는 중요정책선회를 하면서도 이총리에게 사전. 사후보고가 없었다.법대로라면 내각을 총괄토록 되어있는 총리가 소외되고 명령이 먹혀들지않은 것이다. 21일 발언은 이같은 상황을 반전시키려고 상당기간 고심끝에 내놓은 이전총리의 승부수였다.
"내각이 일을 하도록 하지않으면서 책임은 내각에 미루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전총리가 재임기간동안 버릇처럼 강조해온 말은 이제 역사속에 묻히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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