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악성-누구를 위한 방울달기인가

입력 1994-04-21 00:00:00

세상일에는 조짐이란 것이 있다.어떤 사태가 일어나기전에 미리 어떤 예비적인 상황, 또는 암시적인 현상이나타난다는 것이다. 지난주내내 한국의 신문들이 바로 그러한 이상한 조짐앞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언론이란 입장에서는 동업자고 동지였던 TV방송사가 어느날 느닷없이 오랜친구였던 신문쪽에 칼날을 들이댄 것이다.

물론 기습공격의 명분은 분명하다. 시청자들의 눈에는 비겁하게 옛친구를배신했다거나 동지를 모함하는 반역이란 느낌을 거의 느끼지 못할만큼 신문의곪은 급소를 정확하게 잘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의 광고비가 너무 비싸다거나 포장도 안뜯은채 폐지공장으로 고스란히버려지는 신문용지가 3백만부가 넘는다는 이야기는 상당수 국민독자들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한 명분을 갖는다.

TV방송도 바른 소리를 해야 될 책임이 있고 설사 동지라도 잘못이 있으면공정무사하게 비판하고 충고해줄 언론으로서의 의무도 있다.따라서 일부 신문의 구조적인 폐단을 고치자고 비판한 TV의 보도자세를 시비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TV방송이 이미 수년전부터 곪아왔던 문제를 오랫동안 방관하고 침묵해오다 왜 어느날 갑자기 건전한 광고풍토정착이다, 자원낭비다는 따위의 상식적 명분을 걸고 칼을 겨누었느냐는 것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그것도 대체로 1회 또는 특집보도 정도로 다루는 보도관행을 벗어나 연속적으로 4-5일간 뉴스시간에 맞춰 끈질긴 집념으로 보도 했느냐는 점이다.여기서 곱씹어 볼 부분은 TV방송사의 돌연한 반격의 {시기}, 그리고 오랑캐는 오랑캐의 손으로 친다는 고전적 전법대로 아무도 방울달기를 꺼려해왔던신문이라는 힘센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다는 용기있는 역할자로서 동업자{TV}를 골라낸 커튼뒤의 {정체}다.

우선 시기부터 살펴보자. 한국의 언론은 그동안 YS정권과 꽤 사이가 좋았다.얼마나 오순도순했으면 이웃일본의 통신사가 한국언론의 가장 큰 특징은 {대통령찬미에 열을 올리는 것}이라고 소개했을 정도라니까.

그게 약 한달전부터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난 3월 민자당 사무총장의{개혁이 안된곳은 언론계와 종교계뿐이며 세무사찰을 받아야 한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신문의 잔칫날인 지난7일에는 공보처 차관이 {언론의 폐해가 제기되고 있고 특히 보도의 경영면에서 정직하지못한 부분이있다}는 직격탄을쏘았다.

바로 지난주 TV가 시리즈로 비판한 광고, 신문부수, 세금 이야기였다.모든 전략에 있어 적을 치기전에는 가능한한 데미지를 많이 가해두는 법이다.결정적인 KO펀치의 효과를 위해 미리 작은 잽을 날리는 전법과도 같다.국민들앞에 신문의 노출가능한 모든 치부를 발가벗겨 보인 뒤에는 준비된 주먹으로 때려뉘여도 때린자보다는 맞는자의 책임이 더 크고 맞을 짓을 해서 맞는다는 모양새로 망신스레 무대를 끝내 버릴 수 있는 것이다.고양이를 다루기 전에 미리 방울부터 달아두듯 적의 동지손을 통해 적의 치부를 벗겨놓는 전법은 언론길들이기의 전법치고는 단수높은 전법이다.방울달기 전법이 정부와 TV의 합작품일거라는 의심의 증거는 구체적으로는없다. 단지 시기적으로 평소에 알고 넘어오던 묵은 이야기를 정부쪽의 강도높은 신문비판직후에, 상식을 뛰어넘는 연속보도방식으로 맹공을 가한 앞뒤 분위기에서 혹 방울달기가 아니었느냐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는 말이다.그런데 다행하게도 언론과 싸워서 끝까지 이긴 정권은 없다. 폭력과 억압으로 일시적인 침묵을 강요한 경우는 있었지만 항상 그 폭력은 마지막엔 언론에게 굴복당하게했다. 언론이 정권의 폭력에 지지않았던 진정한 힘이 국민에게있었기 때문이다. 이말은 언론이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못받을 때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도 된다.

TV의 공격을 받은 신문의 과오는 부분적이나마 사실이기도 하다.우선 이것부터 개선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권력에 대항할 힘만을 요구한다면허망한 욕심일뿐이다. 신문은 먼저 고칠게 있으면 고치라. 그리고 TV방송은이번 신문공격이 권력의 부탁을 받은 방울달기가 아니라는 결백을 증명하기위해서라도 현 YS정권의 비개혁적인 요소들을 과감히 이번에 신문을 맹공하던 기개와 의욕과 정열도 5일씩 10일씩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비판보도 해주기를 당부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누구를 위해 방울을 달았는가}를 스스로 자문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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