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우리나라 과부들이 흔히 그렇듯이 억척스러운 면이라곤 전혀 없으셨다. 큰 재산가였던 외가의 도움에 기대어 그저 우리들이 얼른 자라나 주기만을 바라셨다. 아버지가 남기신 집을 처분하여 작은 집 두채를 사들여 한채를 세놓은 정도가 어머니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 중 한 채가 아파트 건설붐으로 제법 재산 가치를 가지게 되어 우리들 학비는 건졌으니 그나마 다행한일이었다.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맏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뻔했다. 누구나 나에게는 열심히 공부하여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학교에서 일등을 놓쳐본 일이 없는 나에게 효녀라고도 했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의죽음 이후 큰 사건을 겪지 않고 성장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잠시 갈등을 겪었으나 나는 여러 번 숙고할 틈도 없이내가 성장해온 지방도시의 대학을 선택하였다. 나보다 성적이 못한 아이들이서울의 일류대학으로 진학들을 했지만 난 지방 도시의 국립대학교 사범대학영문학과가 최선이라고 믿었다.
졸업과 동시에 발령을 받았고 그때부터 나는 동생들을 실질적으로 돌보고 가계를 책임졌다. 잘도 시간은 흘렀다. 처음 교사 생활 2년은 너무나 새롭고 재미있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천직이라고까지 여겼다. 그때는 교사가 된 일이야말로 내 인생의 최고 사건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중 결혼을 하거나 유학을 떠나도 그저 그렇게 살 수도 있겠거니 여겼을 따름이다.
교사 생활이 조금 따분해지자 나는 대학원 진학을 하였다. 결혼 얘기를 꺼내는 남자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도 그저 그 나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만생각하였다.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고 결혼이란 사랑이라는 절실함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었던 난 어영부영 결혼적령기를 넘겼다.
준수의 대학 진학은...
여기까지를 기록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실망감을 느꼈다. 내가 적으려고 했던이야기는 이런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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