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날 되돌아본 지역언론사

입력 1994-04-08 00:00:00

대구의 신문역사는 올해로써 90년을 맞는다. 그러나 한국인에 의한 지역 신문역사는 해방 이후 50년으로 국한된다.대구에서 최초로 발간된 신문은 1905년3월 일본인 기무라(목촌유지)가 창간한 격일간 대구실업신보(대구실업신보)였다. 그로부터 40년간 대구에서는 대구일보, 대구신보, 대구신문, 조선민보등 제호의 일간신문이 창간 됐으나 모두 일인 경영체제였다. 1941년5월 조선민보와 대구일보가 통합, 창간된 대구일일신문은 명목상 주주가 일인 63명, 한국인 27명으로 돼있었으나 실제 운영자는 일본경찰과 결탁한 일인이었다.

**해방시대**

45년 해방당시 일인이 남겨준 신문시설은 대구일일신문의 윤전기 2대에 불과했다. 해방후 한달 동안 대구에서는 일어판 신문을 계속 발행해야 할만큼 {준비없는 해방}의 단면을 드러냈다. 이런 시설면에서의 낙후성에도 불구,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자 다수인사들이 신문제작에 관심을 표시했다. 이때의신문은 좌우대립의 정치적 상황과 함께 사상적 노선을 달리해 언론사간의 이념갈등을 빚어내기도 했다. 당시 신문은 봉건적 의식구조를 타파하는데 크게기여했으나 정치적 파쟁과 사회혼란을 조장한 죄과 또한 적지 않았다.대구의 첫 신문은 해방과 함께 창간된 대구일보(대표 윤홍렬)다. 적산인 대구일일신문을 접수, 건국준비위원회가 발간한 이 신문은 미군주둔과 함께 관리권이 넘겨져 한달정도 발행되는 단명에 그쳤다. 대구일보 시설은 45년10월대구시보(대표 장인환)로 넘겨져 첫국문판 신문을 발행하게 된다. 대구시보는 경북도기관지 성격을 띠었으며 주도적인 우익지 역할을 했다. 같은달 창간된 영남일보(대표 김영보)도 우익지의 하나였다.

동시에 출범한 좌익 신문으로는 민성일보(대표 민연근)가 있었다. 이신문은공산당 기관지로 한때나마 큰세력을 떨쳤는데 신탁통치안 찬반을 놓고 벌어진 사회적 갈등 속에서 지지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45년 3개 일간지의 창간에 이어 매일신문의 전신인 남선경제신문(대표 김홍식)이 46년 3월1일 창간되고 이어 경북신문, 부녀일보(이상 46년) 신라공보(47년) 대구합동신문, 대구공보(이상 48년)등이 잇따라 창간됐다.당시 신문은 등록만으로 발행이 가능했다. 원시적인 평판인쇄기 한대를 갖추고 신문용지 선화지.창호지등 닥치는대로 종이를 모아 수백부 정도 찍는 신문도 적지 않았다. 자본과 시설이 열악해 속간과 단간을 거듭하는 언론사가 속출했다. 이같은 무질서한 언론계를 정비하기 위해 미군정청은 정기간행물의등록제를 허가제로 바꾸고 휴간사에 대한 제재규정을 마련(46년5월) 했다. 그결과 46-47년사이 상주일보.남선민보.영남경제.남선상공주보.산업시보.시사신보등 무명 언론사들이 폐간되고 경북신문.부녀일보.신라공보는 대구합동신문(48년1월)으로 통합하게 된다.

**6.25전후시대**

한국동란 발발과 함께 지역 언론계는 4대신문체제로 모습을 정비한다. 대구매일신문, 영남일보, 대구신보, 시사신보가 그것이다.

50년 10월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남선경제신문을 인수, 일간종합지인 대구매일신문을 발간했고, 대구합동신문과 대구공보는 대구신보(50년4월)로 흡수됐다. 또 51년9월에는 시사신보가 창간됐다.

당시 대구는 전시체제 아래서 한국 언론의 중심지가 된다. 각 신문은 6.25동란이후 일요 휴간제를 폐지하는등 커다란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피난문인들의 대구언론 참여는 언론 활성화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대구매일신문은 55년의 필화사건(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으로전국적인 언론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매일신문은 부정선거등 자유당 정권의비정을 신랄히 비난하는등 반독재 자유수호의 일관된 논조를 견지, 경북도내뿐아니라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된다. 반면 일부 신문들은 경영주의 이해관계를 제작에 반영시켜 준 여당적 태도를 보인다. 신문사 경영주들은 신문을 사회의 공기로서 육성시키기보다 계열업체의 방패막이로 이용, 편집의 자주성은말살되고 신문고유의 지도기능도 큰 상처를 입게된다.

**제2공화국과언론**

60년초 대구의 언론은 대구매일신문(50년8월), 영남일보, 대구일보(대구신보의 후신 53년6월), 시사일보(시사신보의 후신 58년3월)의 모습으로 재편돼 있었다. 이같은 언론구도는 허정 과도정부의 신문사 등록제 환원조치로 언론폭발 사태로 이어진다. 60년7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대구에서는 신문비판매일통신등 7개 일간지가 창간됐다. 또 주간지 14개가 발간돼 언론홍수를 실감케 했다.

신문들이 독재정권으로부터 고삐가 풀려나 미증유의 언론자유를 누리게 되자엄청난 사회적 부작용을 노출시켰다. 신문들은 언론기관에 걸맞는 책임의식을 갖지못한채 무책임한 허위 과장보도를 일삼아 사회혼란은 극에 달했다.2공화국의 조기 붕괴는 현실감각을 상실한 언론정책이 상당한 원인이 됐다.**5.16군사정권시대**

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은 사회혼란 조성의 책임을 언론에 돌려 언론기관 시설기준(포고 11호)을 근거로 언론 정비에 나섰다. 혁명정부의 정책은 언론의 사회책임성을 강조한 것이나 조석간 발행금지, 일요휴간 강제등으로 자주성이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른 한편으로 혁명정부는 언론기관 회유책으로 방대한 시설자금을 지원, 언론의 대형화.기업화 계기를 만들었다.혁명정부의 언론정비 작업으로 61년말 대구의 신문은 매일신문(60년7월 명칭변경), 영남일보, 대구일보, 대구경제신문(시사일보의 후신 61년)의 구도를갖추게 됐다. 매일신문은 63년3월 군정연장 반대를 이유로 사설을 휴재하고64년8월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 69년 3선개헌반대등 반독재 투쟁으로 지역의확고한 선도지로 자리잡게 된다.

이같은 4사체제는 72년 매일.영남의 양사체제로 바뀌게 된다. 대구일보는 기자들에게 신문부수 확장, 보증금등 명목으로 돈을 받고 급료를 지급치 않는등비위사실이 드러나 72년3월 자진폐간했다. 또 대구경제신문은 가중되는 경영난으로 자진폐간, 20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제5공화국 시대**

지역 언론계는 80년 10.26사태이후 엄청난 정치권력의 외압을 경험하게 된다.80년 11월30일 1도1사제 구도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영남일보는 매일신문에흡수 통합되기에 이르른다. 또 매일신문은 서울주재기자와 경북.경남 주재기자의 파견을 전면 또는 일부 제한당하고 신문제호도 지역지향의 {대구매일신문}을 사용토록 강제당한다.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사회책임만을 강조한 언론기본법을 제정, 언론 활성화에 찬물을 끼얹는다. 대구매일신문은 양사통합에서 오는 내부갈등과 강제된 활동제한으로 피해를 입게된다.**6.29선언과 신언론**

6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지역 언론은 실로 20여년만에 언론자유화를 회복하게됐다. 언론기본법의 폐기와 정기간행물 등록등에 관한 법률의 통과(87년11월)로 언론사 창간 길을 엶으로써 무경쟁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대구매일신문은 88년3월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환원, 지역언론 활성화의 신호탄을 올렸다. 이어 88년7월 경북일보가 창간되고 89년4월에는 영남일보가 복간했다. 89년11월 대구일보, 90년9월 경북매일(포항), 92년12월경상매일, 93년8월 하나신문, 93년5월 대동일보(포항)가 잇따라 창간됐다. 그러나 경상매일은 창간 1년도 못된 93년9월 경영난으로 휴간에 들어갔고 경북일보는 체임부도등 경영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같은 지역언론의 발전장애는 지역경제력 쇠퇴, 중앙집중적 언론구조등과무관치 않아 지역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