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역사교사 {참회의 방문}

입력 1994-04-02 00:00:00

지난달 31일 오전11시 영주시청.일본 야마가타(산형)시 성북여고 역사교사인 사토 미쓰야스씨(좌등광강.40)가 조일신문기자 기무라후미(목촌문)씨등 일행 10여명을 이끌고 뜻밖의 방문을 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강제 징용돼 일본 나가마츠(영송)광산에서{불령선인(부령선인)}으로 몰려 혹사당한 조선인들을 찾기 위해서였다.당시 나가마츠 광산 조선인 노무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로 알려진 신성달씨(78.예천읍 노하리 14)는 어처구니 없이 당해야 했던 지난날의 뼈저린 아픔의무게를 지팡이에 싣고 노기어린 눈빛으로 이들을 맞이했다.그러나 신씨는 선대의 죄업을 스스로 안고 참회에 나선 젊은 일본인을 앞에두고 구원(구원)을 되씹기에는 너무나 흘러버린 세월이었다.일본이 대동아 맹주론을 빌미로 조선인 용병, 노무자, 정신대등을 마구잡이로 {사냥}해 내몰았던 1940년 9월.

당시 25세의 청년이던 신씨도 일본인의 꾐에 빠져 동료5명과 함께 부관(부산-시모노세키)연락선을 타고 야마가타시 나가마츠구리광산에 도착했다.당시 이 광산에는 조선인 노무자 50여명이 끌려와 일본인이 꺼리는 갱내 굴착작업조에 배치돼 짐승처럼 학대받으며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3교대로 작업했지만 조선인들은 2교대로 혹사당했다.

신씨가 이 광산에 징용된지 1년3개월만인 1941년12월1일 조선인 노무자 전원이 횃불, 몽둥이, 곡괭이등을 들고나와 광산관리사무소를 습격한 이른바 나가마츠광산 {조선인 폭동사건}이 발생했다.

"광산관리책임자 사토가 하루 노임을 조선인들에겐 1엔30전을 주면서 일본인들에겐 3엔50전을 지급하고 있는 사실이 들통났기 때문이었다"고 신씨는 설명했다.

당시 경찰은 {순사} 30여명을 풀어 폭동관계자 28명을 연행, 이가운데 악질분자로 판명된 17명을 공무집행방해죄를 적용해 구속했고 관할 {재판소}는 신씨등 조선인 5명에게 벌금 60-80엔과 3-4년의 실형을 선고했었다고 한다.자백을 강요하는 고문에 못이겨 남홍경씨(당시 24세.강원도 평창군)가 수감도중 구치소 창살에 목매 자살을 기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신씨는 생생히 기억한다.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 50엔을 허리춤에 숨겨놓았다가 발각돼 사흘동안 꼼짝할수 없을 만큼 심한 매질을 당했었다"며 지그시 눈을 감는 신씨.54년만에 마주앉은 가해자의 후손 사토씨 일행과 피해당사자인 신씨가족들사이엔 대화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반성과 용서의 교감이 진득하게 묻어났다.사토씨는 신씨에게 {역사의 현장} 일본초청을 제의했고 신씨는 "건강이 허락하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자리에 있던 기무라기자는 "이번일이 한.일양국 선린관계의 길잡이가 되는또하나의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