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줄곧 내가 해왔던 모든 일은 마오리와 파케하(이방인, 즉 백인을가리킴)가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한다.나는 뉴질랜드 국민들이 이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기를 원한다"3백50만 뉴질랜드인구의 약 13%를 차지하는 마오리족의 대모로, 국민적인 추앙을 받던 휘나 쿠퍼여사가 지난 26일 밤 99세의 나이로 뉴질랜드 북쪽 호키앙가만의 해변에 있는 자택에서 타계했다.휘나여사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볼저 총리를 비롯 제1야당인 노동당 클라크 당수, 룩스턴 마오리부 장관등 각계 거물급 인사들이 즉각 조문을 위해 달려와 그녀의 자택이 문전성시를 이룸으로써 그녀의 명성과 위상을 실감케 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에게는 국토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그리고 백인들에게는 화합과 단결을 강조하며 몸소 행동으로 이를 실천했던 휘나(통상 휘나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음)여사는 1895년12월9일, 가난한 마오리 가정의먼지 수북한 부엌에서 태어났다. 출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의 생애는한마디로 마오리의 영욕을 대변하는 불꽃같은 삶이었다.
그러나 가톨릭계통의 성 요셉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수줍음을 잘 타는 여느여성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이런 그녀가 마오리를 대표하는 걸출한 여성으로 사람들의 면전에 등장한 것은 1951년 마오리 여성복지동맹을 창설하고 스스로 회장에 취임하면서부터.휘나여사가 가장 역점을 두고 벌인 사업은 토지불매운동. 이는 생활이 곤궁한 마오리의 약점을 이용, 백인들이 이들의 토지를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간데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또한 1975년9월14일,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빛나면서도 인상 깊은모험을 감행한다. 뉴질랜드 북섬 맨 위인 테 하푸아에서도 수도 웰링턴까지장장 1천1백km의 도보 {국도행진}에 나선 것.
4세짜리 손녀의 손을 잡고 80노구를 이끄는 휘나 여사의 뒤로 5천여명의 마오리가 뒤따르는 이 국토행진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휘나여사는 특히 지난90년 오클랜드에서 열린 영연방 경기대회의 개회식행사중 휠체어를 탄채 운동장 한복판에 등장, 뉴질랜드인들에게 인종차별철폐를촉구해 구체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인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휘나여사의 위대한 점은 결코 지나치게 내것만을 요구하거나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 이로 인하여 한때 마오리로부터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기도 했지만 그녀의 한결같은 소망은 뉴질랜드가 비록 마오리의 땅이긴 하지만백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이상 함께 발전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번 결혼한 남편과 모두 사별해야 하는 개인적으로는 큰 불행을 겪기도 했던 휘나 여사. 그렇지만 그녀가 남긴 유언은 뉴질랜드에 대한 끝없는 애정,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눈을 감기전에 마오리와 파케하가 하나가 되는 것을 보아야 할텐데"(오클랜드.이성우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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