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춤추는 숲

입력 1994-03-28 00:00:00

허록의 악보를 폈다. 수 개월 전에 겨우 암보를 마친 뒤, 정말이지 제대로연주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을 기억했다. 허록이 이러한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였다. 악기를 어깨에 얹었다.턱받침대에 턱을 대자 차가운 감촉이 생소하게 턱에 닿였다. 심호흡을 하였다.몇차례를 반복하며 튜닝을 하였다.이윽고 활을 켜나갔다.

처음 몇 소절은 제대로 음을 맞추어나가는가 싶었는데 오랜만에 잡아보는 활이어선지 음이 빗나가기 일쑤였다. 87소절, 아다지오 Bb에 이르렀을때 활을멈추었다. 불현듯, 바이올린의 몸통에서, 한달여 전에 의혜를 그리워하다 사정(사정)했던 그 냄새가 떠오른 것이다.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정액이 흘러내리던 모양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혜의 몸처럼 뜨겁게껴안았던 일들, 나비와 함께 춤추었던 그 꿈속의 광경들이 잇따라 마구 살아오르는 것이었다.

동유는 악기를 내려 무릎에 세우고는 긴 호흡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다시 악기를 어깨에 올렸다. 활을 켰다. 하지만 이번엔 열소절을 넘기지 못하였다.피치카토로 탱탱 튕기다, 포르테로 E선을 점점 격하게 켜나가다, 활손잡이 근처가 현에서 미끄러지며 A선으로 이동할 찰나, 동유는 저도 모르게 활을 잡은손으로 현을 뜯어버린 것이었다. 현이 날카롭게 손마디를 파고들며 팅, 소리와 함께 제일 굵은 G선이 뜯겨졌다.

동유는 참을수 없는 열기를 등줄로 느끼며 벌떡 일어섰다. 악보대에 놓여있는 허록의 두터운 악보를 양손으로 쫙 찢어 두동강을 내버렸다. 악보가 낱장으로 풀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활을 들어 악보대에 내리쳤다. 나무활이 꺾였다. 동강난 위쪽이 말총줄에 매달려 달랑대는 걸 강대상 아래켠에 집어던졌다.모든게 순식간의 일이었다.

앉아있던 방석을 내팽개쳤다. 긴 나무의자도 가슴께까지 들어 뒷의자에 던졌다. 억제할 수 없었다. 휘발유 불이 등에 끼얹힌 것처럼 예배용 긴의자 위를구둣발로 뛰어다녔다. 뛰어다니다 쓰러졌고, 다시 미친듯이 뛰어다녔다.작은 의자 하나를 들어 창문에 집어던지곤 동유는 마룻바닥에 펄썩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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