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숲87

입력 1994-03-15 00:00:00

11월 중순의 어느 오후였다. 이날 아침부터 끄느름한 하늘이 어쩌면 첫눈이라도 쏟을듯 했다.그즈음, 의혜와 미묘한 대로 정깊은 만남이 있은후, 동유의 마음은 온통 그녀에게로 쏠려 있었다. 허록의 악보를 앞에 펴놓긴 하지만 정작 그의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밤새 들여다본 멘델스존이나 차이코프스키의 아름다운 가락들이었다. 이상한 것은 지난밤 그녀에게 부칠 편지나 일기를 쓰다 문득 마음속에 어떤 음률을 느껴 허록 몰래 구입한, 이를테면 레하르의 왈츠곡{금과 은}이나 비발디의 바이올린 곡등을 한번 들추어서 읽으면 다음날 고스란히 암보(암보)가 되는 것이었다. 마치 머리속에 악보를 채록(채녹)하는 기술을 갑자기 익힌 듯 하였다. 전에도 흥이 붙을때 몇번 허록의 악보가 어렵잖게 암보된 적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머리속에 박히듯이, 혹은 폐부에 심기듯이 뚜렷이 암기되는 일을 없었던 것이었다. 온몸이 감흥에 젖지 않으면 될수없는 일이었다. 비발디의 경쾌하고 산뜻한 리듬들, 모짜르트의 평화스러운선율들, 혹은 롯시니의 경묘한 리듬과 관능적이고 달콤한 멜러디가 제각각의의미를 찾아, 마치 수분이 목마른 화초의 물관조직을 교묘하게 찾아 흡수되듯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허록은 아는지 모르는지, 알아도 모른체 하는지, 그의 은밀한 쾌감을 그대로덮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은밀한 쾌감이 언제까지나 이어지지가 않았다.11월 중순이 지나가는 이날-연습장인 지하 빈교회당이 한 주택업자에 매매되었다는 통고를 받은 이날-허록은 오후 세시쯤 되어 연습실로 나왔다. 며칠간 깎지않던 수염을 말끔히 깎고 나온 그는, 동유가 식사를 하지않았다는 걸알고 음식점에다 한상을 주문하였다. 그리곤 피아노에 앉더니, 자신의 바이올린 곡 {폭포}를 피아노로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악기에 자신의 감정을 불어넣는데 특이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가 없는 손가락이 검고 흰건반 위를 춤추고 있으면 그가 연주를 한다기보다 악기 스스로 소리를 지른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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