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제인-여상원 전대구상의회장(4)

입력 1994-01-20 08:00:00

**첫 회장선출 출사표**15대 대구상의회장 선거가 올4월경 실시될 예정이다. 공법인 상공회의소가출범한지 만40년 되는 해로 대구상의회장으로서는 려상원이래 오일룡, 박윤갑,김홍식, 박성형, 박재을, 강재조씨를 거쳐 새로운 종합민간경제단체장을 선출하는 행사가 된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먼훗날 그의 공과에서 옳고 그름이 지적되겠지만 무엇보다 그시절 단체장의 선택은 동시대 상공인의 지혜로운 판단에 달려있다할것이다. 상의회장 자리가 인맥에 의해 대를 잇거나 경제원로들의 거중조정이란 싱겁고 형식적인 절차를 밟게된다면 그 단체의 발전은 물론 지역경제계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나친 과열양상의 선거는 지역경제력의 낭비를 초래할 우려가 있고 후보당사자들에게도 큰 상처를 입히는 교훈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알수있다. 려상원이 6대에 걸쳐 지켜온 대구상의회장 자리는 도전과 응전으로 얼룩져 왔다.

해방후 임의단체성격의 경북상공회의소시절때 이미 상의일에 참여했던 그는53년 상공회의소법 시행령이 공포되고 54년 공법인 대구상공회의소가 첫회장을 선출할때 출사표를 던지게 된다.

1월24일 오후2시 도청회의실서 열린 대구상의회장선거는 대구경제계의 대단한 관심거리였다.

공법인 상의회장을 처음 뽑는다는 사실에도 관심이 컸지만 해방후 경북상의의 회두를 8년간 지낸 관록의 권연구에 신예 려상원이 도전장을 내놓았기에흥미가 더했다.

선거결과는 여상원 23표, 권연구 17표로 개혁을 요구하는 신진세력들의 승리로 종결났다.

여상원은 69년1월15일 퇴임할 때까지 15년을 대구상의회장직을 맡아왔으나그동안 반려세력의 도전도 여러번 겪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뛰어난 사교술과비상한 선거전략을 통해 자리를 지켜나갔다.

57년 2대 상의가 구성될때 여회장은 첫번째 도전을 받는다. 최익성(경북직물조합이사장)이가 주축이돼 [직물에서 회장을 맡자]는 분위기가 나오면서 당시1.6회회장이었던 김학선을 차기회장으로 추대키로 중지가 모아졌다. 그러나여상원의 반려세력에대한 개별 격파로 일은 성사되지못하고 김학선을 부회장에 앉히는 선에서 상의선거가 매듭지어졌다.

**미인계까지 등장**

여회장에대한 최대의 도전은 64년 5대회장 선거때 일어난다.해방후 경북상의 시절 권연구회두밑에서 함께 일해왔던 그의 영원한 라이벌이순희와 불꽃튀는 한판 승부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순희는 대구 3대면방공장의 하나인 내외방직사장이자 영남일보사장으로 여상원과는 필적이 될만한 인물이었다.

2대째도 그러했지만 대구상의회장 여상원은 막강한 힘으로 상의를 독주해나가상공의원들간에는 [여회장의 독주가 너무 심하다]는 불만이 점차 커져갔고5대회장 선출을 앞두고는 그의 독주를 막아야한다는 상공업계의 분위기가 극도로 팽배했다.

그해 7월21일 상공의원 선거를 스타트로한 선거전은 갈수록 열기를 더해갔고8월들어 실시된 여.이두사람의 상의회장선거는 민간단체장 선거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게된다.

막대한 자금동원과 마타도어전이 벌어졌나하면 미인계가 등장하고 첩보전을방불케하는 기발한 작전들이 등장한다.

그당시 소문에는 여상원이 5천만-6천만원, 이순희는 7천만-1억원정도를 선거비용으로 썼다고 한다. 그시절 잘지은 육칸곡자 한옥이 80만-1백만원할정도였으나 지금의 화폐개념으로 환산하면 50억-1백억원가량이 선거비용으로 날아간셈이라고나 할까.

**초반전은 크게 불리**

여상원은 상의회장으로서 유리한 입장을 살려 상의내에 선거작전본부를 차려놓고 동신섬유에서의 지원과 대구일보를 발로 삼았다. 이순희는 금호호텔과영남일보, 본정여관을 선거사무소로해 득표활동을 벌여 나갔다.여회장의 선거 참모진에는 김재소 구구서등이 있었고 이순희쪽에는 박찬, 강판용등이 포진하고 상공인가운데는 김준성등이 그를 도왔다.예상했던대로 선거초반전은 여상원에게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갔다.[그만큼했으면 됐지 더이상 하려는 것은 무리다] [대구상의도 이젠 주인을바꾸어야 한다] [상의회장 자리가 자신의 명예욕을 채워주는 곳이냐] 곳곳에서 여회장을 비방하는 소리가 터져나왔고 지역언론도 여상원이 불리하다는쪽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이런가운데 여상원은 대구일보 황모기자를 통해 이순희쪽 지지 상공인에대한세무사찰을 실시토록 세무서에 압력을 가한다. 또 이순희의 맹렬한 지지자인모씨에게는 그가 단골로 다니는 요정집 기생을 매수, 선거날 불참토록 공작도 했다.

한편으로는 오전4시부터 상공의원 개개인 집을 일일이 찾아가 [대구경제를위해 열심히 일할테니 한번 밀어달라]고 사정도 하는등 강온양면작전을 잘 구사해 나갔던 것이다. 특히 오일룡을 중심으로한 청구대출신 상공의원 8표를자신에게 가져오는데 성공한 여상원은 전세를 크게 호전시켜 나간다.그러나 사태를 반전시키는 결정적 계기는 이병철의 태도였다.선거열기가 한창 일무렵 이순희가 서울에 있던 이병철을 찾아가 [그사람 그만큼했으면됐지 또 하려고하니|내가 할터이니 협조를 부탁하오]라며 삼성의구원을 부탁했다. 이때 이병철은 [내일 대구에 내려가 세사람이 논의해보죠]하며 다음날 오후2시 제일모직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다음날 오후5시가 지나도 무슨 영문인지 약속했던 이순희는 나타나지 않았다.화가 대단히 난 이병철은 여상원에게 [여형, 이번 상의회장자리 양보하지말아요]하며 여회장 지원쪽으로 태도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박윤갑전대구상의회장 증언)

따라서 선거중반까지만해도 이순희편에 있던 허병기, 김시경, 박승관, 허준녕등 이른바 삼성계 표가 등을 돌리게됐던 것이다.

**끝내 김준성씨 설득**

게다가 이순희가 철저히 믿었던 김준성도 여상원으로부터 특별의원을 약속받고 여쪽으로 떠나가 버렸다. 선거가 끝난뒤 김준성은 상의기자실에 나타나 선거막판에 이순희를 떠난 이유를 이렇게 해명했다. [대구경제를 위해 나름대로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상의를 꾸려가는 문제를 여회장과 기탄없이 의견을교환한 적이 있고 그분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비슷해 함께 일해보려고 했던것입니다]

그 당시 여상원은 학벌이 좋고 경제지식이 해박한 김준성에 대해 호감을 가졌었고 그의 마음을 돌리기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으며 그의 딸이 동기동창관계인 김준성의 딸을 설득해 도움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8월5일 오전10시 실시된 회장선거는 여상원17표, 이순희11표로 여의 승리로막을 내렸다.

여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건강이 유지하는한 모든 결점을 고쳐 대구상공계를위해 관계사업체를 떠나 공적인 일에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그러나 두사람의 이러한 피나는 소모전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경영하던 기업의 몰락을 초래하는 원인(원인)이 됐고 훗날 어느누구도 기업가로서 승자자리에 앉는 영예를 갖지 못하게한 선거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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