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입적한 이성철스님

입력 1993-11-04 08:00:00

{신비의 베일에 싸인 인물} {삼천배를 하지않으면 뵐 수 없는 스님} {한국불교의 사표}로 불리던 그였다."이성철종정이 오늘날 이 땅에 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 불교, 나아가 우리 사회의 굳건한 정신의 지표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그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우뚝선 봉우리였다.

그는 한일합방 2년뒤인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이상인 어머니 강상봉사이에 6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생전에{남의 땅 밟지 않고 산다}는 정도로 부농이었고 매사에 당당하여 굽힐 줄을몰랐다. 외고집과 당당함에 있어 그는 부친을 빼다 꽂았다고 한다.그는 당시 조혼풍습에 따라 일찍 장가를 들었다. 슬하에 유일하게 딸 하나를두었으나 정작 그 딸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출가했다.

그가 속세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소학교 4학년 과정과 서당에서 {자치통감}까지 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철학, 사상, 문학, 경전을 두루 독학으로 탐구했다.

불가에서는 그에대한 일화중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항상 비상(비상)을 지니고 다녔다. "이 세상은 진정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그렇지 않다면 살것이 무에 있나. 이 비상을 입에 털어넣고 말게"그의 생에 대한 자세는 이러했다. 만권서적을 뒤적이고 고금사상을 파헤쳐본 그는 "영원한 삶의 길이 부처님의 말씀에 있다는 걸 깨닫고 마침내 출가의길에 나섰다.

그때가 25세. 1936년이었다.

{하늘에 닿는 큰 업적도 붉은 화로에 녹은 눈이요. 바다를 건너뛰는 기개도해가 나면 스러지는 이슬방울이라. 그 누가 일시의 단꿈에 젖어 살다 가리오.초연히 홀로 만고의 진리를 좇겠노라} 그의 출가시로 알려진 것이다.그후 그의 행적은 고불고조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문경대승사에서의 장좌부와.봉암사시절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의 철조망을 치고 지낸 일등은 모두가 숱한 일화를 낳고 있지만 이는 정법수행에 투철한 그의 면모를 알려주는 것들이다.

불교계의 비구.대처싸움에 대해서도 그는 "뼈다귀를 다투는 개꼴이 되어서는안된다. 내적 수행이 없이 절 뺏는 싸움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고 강력히주장, 산사에서의 용맹정진을 일러왔다.

그의 업적은 한국불교의 법맥을 바로 잡고 선수행의 정노를 밝혔으며 한국불교가 나아갈 길과 인생의 길을 환히 밝혀 놓은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그의 법어집 11권과 설문 강설서 37권은 "사람은 가도 법은 남는다. 법에 의지해 수행하라"는 고불고조의 말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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