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것이 뒤틀린 시절에 국가를 위한다고 한 일이었지만 결국 정치세력의도구로 이용된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해방후 최초의 조직적 언론탄압으로 기록됐고 국회에서 진상규명에 나서는등전국민의 여론을 들끓게 한 55년 매일신문테러사건 가담자이자 목격자인 강병내씨(57.대구시수성구범물동)가 사건발생 38년만에 입을 열었다.[55년 9월14일 오후 대구 방천시장 부근에서 반공궐기대회가 있었죠. 그때누군가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최석채주필이 쓴 사설이 실린 매일신문을 참석자들에게 뿌렸습니다. 곧이어 어디서 준비했는지 흥분한 사람들에게 몽둥이와 쇠망치등이 나눠졌고 버스로 신문사에 몰려갔습니다]당시 대한상이군경회경북지부 감찰로 있던 강씨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문사에 들어갔다가 청년들이 직원을 구타하고 인쇄시설을 부수는등 심한 행패를부리는 걸 보고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강씨는 [앞장선 청년들이 모처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는 소문과 배후에현직 경찰계급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 사건후 범인들이 최주필보다가벼운 처벌을 받은 사실등으로 미뤄 정치권 인사들이 이들을 부추기는등 깊숙이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강씨가 테러사건에 가담은 했지만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자리를피한 것은 나름대로의 사정때문.
충북단양이 고향인 강씨는 아버지가 남로당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들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주위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자 이를 피해 15세때인 51년 군에 들어갔다.
나이가 어려 군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 강씨는 나이를 20세라고 속이고이름도 본명인 강병래 대신 김병태로 바꿨다.
노무군인으로 있던중 어느날 다리에 총탄을 맞아 대전육군병원에서 치료를받고 52년 군에서 제대해 상이군경회에 가입, 전국의 깡패들과 혈투를 벌이며치안을 확립하는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
[당시에는 집안에 부역자가 있다는 사실만 밝혀져도 온갖 고초를 당할 때입니다. 사건 때문에 아버지일이 탄로나 문제가 생길까봐 현장에서 피했지요]김병태란 가명으로 40여년을 살다 강씨는 자식과 손주들에게 뿌리를 찾아줘야겠다는 일념에서 91년8월 1년여의 재판끝에 본이름을 되찾았다.86년부터 유료주차관리사업소 주차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강씨는 3남3녀중 군대간 막내아들만 빼고 모두 결혼시켰다.
강씨는 후배들에게 교훈을 주기위해 기회가 주어지면 책이나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공개하고 싶다고 밝혔다.
강씨는 [신문사 테러사건은 요즘 세상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불행한 일이었다]며 [다시는 불순한 정치세력에 의해 어떤 단체든 사람이든 앞잡이로 동원되는 악습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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